(제4회 짧은소설 공모전 당선작) 나무들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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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

유승민

*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물론 나무들은 항상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성장이 체감될 정도로 빠르게 자라나고 있으니 경우가 달랐다. 나무들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구름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나무가 자라나는 것 또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거리는 어두웠다. 나무가 심어져 있지 않은 땅도 있었으므로 완전히 햇빛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무들이 울창해지면서 그늘로 뒤덮인 땅의 면적은 무척 넓어졌고, 그 응달에 뿌리를 내린 대부분의 작은 식물들은 햇빛을 못 받아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위의 나무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성한데 땅 위는 죽어가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
윤희는 책상 앞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문이 애매한 높이에 있어서 앉은 채로는 밖이 보이지 않았기에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였다. 나뭇가지들의 거친 표면에 반사된 빛이 창문 밖으로 점점이 보였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잎사귀들이 무성한 창밖은 깜깜했다.
윤희는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맞은편의 아파트밖에 없었지만 아파트를 바라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멀리서 본 아파트는 인형의 집 같았다. 좁은 방들 각각에는 사람들이 들어 있었고, 그들은 위, 아래, 옆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모른 채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텔레비전 화면의 알록달록한 빛이 흘러나오는 어둑한 방,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 이 모든 것들을 윤희는 책상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바라보곤 했다.
나무들이 자라면서 건너편 아파트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제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뿐이었다. 나무의 끄트머리가 창문 앞까지 자라 올라왔을 때 윤희는 깜짝 놀랐었다. 윤희는 10층에 살고 있었다. 나무가 이 정도 높이까지 자란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는 윤희의 창문을 완전히 가려버렸고 또 위로 자랐다. 가지들은 날이 갈수록 촘촘히, 무성하게 자라났다.

현관문이 열리고 윤주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방에서 나와 언니에게 인사를 했다. 윤주는 부엌에 들어가 간단한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자매는 식탁에 마주앉아 조용히 식사했다.
가게를…… 정리해야 할까 봐. 윤희는 고개를 들어 언니의 눈을 들여다봤다. 가게에 햇빛이 도저히 들지를 않아. 식물들은 죽어가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전에 하던 일도 다시 하고 싶고.
윤희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가게를 볼 사람이 없으니 가게는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정리하게? 이번 달 안으로, 최대한 빨리. 너, 한 번 보러 안 갈래?

아파트를 나와보니 밖은 어두웠다. 윤희는 고개를 젖혀 아파트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나무는 거의 아파트 전체를 감싸듯이 자라고 있었다. 담쟁이 같은 덩굴성 나무가 아닌 회화나무 교목이었는데도, 높이로 인한 불안정함 때문인지 나무는 아파트에 기대듯이 맞닿아 있었다.
윤주가 운영하는 꽃집은 집에서 15분 거리인 상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매는 어두운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좁은 차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인도가 있는 골목이었다. 인도를 따라 메타세콰이아와 가로등이 늘어서 일종의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은 초목에 묻혀 희미했다. 빛은 위에서 뿌옇게 보였다. 이 한적한 거리는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었다.

*
윤희와 윤주의 부모님은 14년 동안 꽃집을 운영했다. 구색만 겨우 맞춘 작은 가게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은 나름의 감각과 수완으로 규모를 천천히 늘려갔다. 그들은 식물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루었다. 일반적인 꽃다발과 꽃바구니는 물론이고 화환과 성탄절 리스, 월계관, 수경재배식물, 조화, 수초까지 다루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특히 애정을 갖고 있던 것은 관엽식물이었다. 유칼립투스, 몬스테라, 싱고니움, 청페페와 같은 관엽식물들은 키우는 데 손이 적게 가고 공기를 쾌적하게 해주는 효능까지 있어서 부부의 예쁨을 받았다. 또한 꽃다발의 재료로 쓰이는 한 송이 한 송이의 꽃들은 아무리 온도를 맞춰주어도 며칠이 지나면 시드는 데 비해, 관엽식물들은 생명력이 질겼으며 광선이 약한 실내에서도 잘 자랐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그들은 운전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다름아닌 나무들 때문이었다. 자동차의 빨간 불빛들이 젖은 도로에 번진 새벽, 차량 열한 대가 연쇄적으로 추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선두로 가던 차가 나무에 가려진 도로 안내 표지판에 당황하여 급정거한 것이 원인이었다. 앞서 가던 승용차의 새빨간 후미등이 갑자기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다음 순간 뒤에서 오던 차가 그들의 트럭을 들이받았다. 그들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작은 트럭의 적재함에는 근조 화환이 있었다. 그들은 먼 친척의 장례식에 근조 화환을 직접 배달하는 길이었다.
장례를 치른 후 꽃집을 관리하는 일은 윤주가 도맡게 되었다. 윤주는 화환을 주문 받는 일과 꽃꽂이 수업, 배달일에서 손을 떼고 꽃집의 규모를 서서히 줄여 나갔다.

*
꽃집은 어둠 속에 있었다. 가게 앞에는 플라타너스가 위협하듯이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무는 키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몸통 자체도 거대하게 자라 뿌리 부근의 보도블록이 뒤틀리듯 솟아 있었다. 나무는 비좁은 거리에 우뚝 서서 가게의 입구를 막다시피 했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꽃이 시들어가는 냄새였다. 불을 켜자 가게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쪽의 진열대에는 화병이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손질된 꽃들이 몇 다발 누워 있었다. 관엽식물들은 창가의 진열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외의 물건들은 이미 처분되었는지 가게는 휑하게 비어 있었다.
윤희는 관엽식물 앞으로 다가갔다. 생명력이 강한 그들 역시 두어 달 넘게 햇빛을 받지 못해 축 쳐진 모습이었다. 얘네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버려야겠지. 사려는 사람은 당연히 없고. 다 시들어가는 마당에 누구한테 줄 수도 없고. 계속 키우자니 햇빛도 안 드니까. 윤희는 청페페의 잎에 손을 가져다 댔다. 노랗게 시든 잎은 축축하고 미끈했다.
내가 가져도 돼? 윤주는 고개를 돌려 윤희를 쳐다보았다. 집에도 햇빛이 안 들잖아. 옥상엔 햇빛이 들겠지. 우리 아파트에 옥상 있지 않아? 응, 아마. 그럼 거기다 올려 둘래.

윤희는 주목나무를 헤집고 들어가 경비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윤희는 문을 살짝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경비원 대신, 젊은 남자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 창문 너머로 봤던,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인 것 같았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윤희는 그에게 다가가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윤희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저 옥상 문 좀 열어주세요. 그제서야 그는 소스라치듯 일어나 윤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예요 이 시간에? 옥상은 왜요? 식물이 죽고 있어서요. 잠깐 있다가 내려올 거예요.
남자의 대답은 ‘안 된다’였다. 화재가 발생해서 대피할 때에나 옥상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식물만 두고 온다구요. 윤희가 한 번 더 말했지만 남자는 앞서 한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
어둠 속에서 윤희는 눈을 떴다. 오전 9시였다. 아침이 되어도 그늘에 뒤덮인 방안은 어슴푸레했다. 사물들은 짙은 녹색으로 보였다. 윤희의 시선이 검은 창문에 닿았다. 윤희는 나무로 뒤덮인 이 창문, 그 너머의 좁은 방, 그 안에 들어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윤희는 자신이 나무 구멍 속에 틀어박힌 벌레 유충이 된 것 같았다. 답답했다. 윤희는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는 굵고 단단해 보였다. 나무 말단의 잔가지인데 굵기는 큰 뱀과 맞먹어 더 이상 잔가지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창문을 열면 바로 손이 닿는 거리에 있었다. 창문 밖으로 나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앞에, 저 가지를 타고 올라간다면. 윤희는 책상 위에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고개를 비집어 위를 살폈지만 무성한 잎들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윤희는 낡은 천가방에 청페페를 넣어 어깨에 매고 책상 위에 쪼그려 앉았다. 나뭇잎들 사이로 손을 뻗자 서늘함이 느껴졌다. 윤희는 창문 위쪽의 굵은 가지를 두 손으로 잡고, 오른발을 바로 앞의 가지에 내딛었다. 문득 이곳이 지상 10층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윤희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세로 있었다. 쪼그린 왼쪽 다리가 심하게 저려왔다. 잠시 뒤 윤희는 손아귀에 힘을 주고 창문 밖으로 풀쩍 뛰어 왼발도 나뭇가지에 내딛었다.
낮이었음에도 그늘 아래는 어두컴컴했다. 축축한 공기에서는 흙냄새가 났다. 어느 정도 적응하자 나무를 오르는 일은 순조로웠다. 가지들은 생각보다 하중을 잘 지탱했다. 팔다리의 힘만 풀리지 않는다면 옥상까지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윤희는 고개를 치켜들고 굵은 나뭇가지들을 골라 팔을 걸었다. 다리로는 밑의 가지들을 더듬으며 디딜 곳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나무라고 해서 무성하게 자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래쪽의 잎들은 위의 잎에 가려 사그라들어 있었다. 검게 쪼그라들어 차갑고 물컹해진 잎들은 쉽게 떨어져 내렸다. 위로 올라갈수록 잎사귀들은 싱싱하고 단단했다. 얼마나 올라왔는지 가늠하기 위해 윤희는 창문들을 건너다보았다. 창 너머를 구경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잎사귀들에 가려 창문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윤희는 흠뻑 젖어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나뭇잎에는 더 많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차가운 잎의 표면에 응결된 이슬일지도 몰랐다. 젖은 몸은 무거웠고 가지는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기계가 돌아갈 때 날 법한 뭉실한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15층의 창문이 끝내 시야에 들어왔다. 마지막 창문이었다. 3미터 정도만 올라가면 옥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힘을 얻어 억척같이 나무를 올랐다. 이제 아파트의 꼭대기가 보였다.

윤희가 다다른 곳에는 옥상이 없었다. 아파트의 꼭대기는 박공 지붕으로 덮여 있었다. 윤희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지금껏 아파트 위에 옥상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옥상이 없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윤주와 경비실의 남자 역시 옥상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 않은가.
그런데 따지고 보니 옥상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는 근거가 없었다. 각도상 10층 창문에서는 아파트의 꼭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윤희는 15층에 가본 적이 없었으며 15층의 계단이 옥상과 이어져 있는지 어떤지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옥상에 대해 들은 기억도 없었다. 막연히 옥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찌 됐든 윤희에게는 지친 몸을 누일 장소가 절실했다. 옥상이 없다면 지붕에라도 올라가야 했다. 다행히 지붕의 경사는 완만했고 가장자리에는 턱이 있었다. 몸을 잘 뻗으면 지붕의 턱에 팔을 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희는 오른팔로 나뭇가지를 단단히 감고 왼팔을 뻗어 지붕에 팔꿈치를 받쳤다. 몸에 힘을 주고 재빨리 오른손으로 지붕의 턱을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지붕의 턱은 폭이 넓어 눕기에 충분했다. 윤희는 가방을 내려놓고 청페페를 꺼냈다. 안 그래도 시들했던 잎들이 가방에서 아무렇게나 뒹굴어 식물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윤희는 지붕의 끄트머리로 기어가 화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윤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비가 오고 있었다. 올라오면서 들었던,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는 이명이 아니라 비가 오는 소리였다. 빗방울은 나뭇잎의 표면을 때리고,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떨어지며 뭉실하고 희미한 울림을 만들었다. 지붕과 맞먹는 높이에 나뭇잎들이 떠 있었다. 잎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일렁거렸다. 윤희는 넘실대는 잎사귀들의 바다를 지켜보았다.
윤희는 지붕의 턱에 몸을 뻗고 누웠다. 오랜만에 본 하늘은 푸르스름한 잿빛을 띤 흰색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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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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