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2017년이었습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동아리 지원금으로 100만원을 받았고, 그 중 약 50만원을 문학 관련 행사비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애초 계획서 제목이 ‘문장을 담은 연필’인가 그랬기 때문에 진행 중이던 독서모임과 연계, 괜찮은 문장을 뽑아 연필에 인쇄한 뒤 10월에 열리는 만국시장에서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존 문장을 연필에 새기는 일이 왠지 시시하게(?) 느껴졌고, 아니, 단순하게 생각됐고,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좀 더 창조적인 일을요. 이런저런 것을 궁리하다가 짧은소설 프로젝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코디언’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는데 한 해 전에 5단 명함을 만들고 ‘아코디언명함’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꽤 호의적이었어요.(후에 ‘이야기가 있는 아코디언명함’, ‘나를 표현하는 아코디언명함’이라는 타이틀로 이곳저곳에서 강의했습니다) 아코디언 형식에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해 카드소설, 카드에세이, 카드인터뷰라고 명명하고 소설의 자리, 에세이의 자리, 인터뷰의 자리에서 활용했습니다. 참여자들의 결과물을 종이책으로도, 웹북 형태로 제작, 공개했습니다. 2016년 연희문학창작촌 ‘문학, 번지다’ 프로젝트에 <돋보기 없이 보는 카드소설>이 선정돼 5~60대 어른들과 프로그램을 이끌고 전시도 했죠.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이름이 ‘아코디언북 짧은소설 프로젝트’입니다. 다른 건 제가 다 하고 지원금 50만원으로는 책을 인쇄하기로 했죠. 문화재단에 사업변경신청서를 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1인 문화예술연구소 ‘마음만만연구소’(사업자번호를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외에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비날다책방을 떠올렸고, 책방 대표님께 후원으로 책방을 넣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대표님은 책방 운영 외에 인천에서 문화기획자로 활발히 활동하는 분이었고, 저의 계획을 들은 뒤 흔쾌히 허락, 적극적으로 함께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문학하는 친구에게는 심사위원을 부탁했어요.
저는 기획, 홍보, 접수, 심사, 책 디자인, 시상식, 단행본 배포를 맡았습니다. 재단 지원금 50만원은 인쇄비로 썼고, 수상자 10명에게 드리는 3만원 상당의 상품권(총 30만원)은 저와 나비날다책방 대표, 심사위원을 맡았던 제 친구가 사비로 10만원씩 내서 구매했습니다. 재미로 시작했는데 의미 있게 봐주시는 분이 많아서 신이 났고, 제 책도 아닌데 지인들에게 마구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편비로도 수 만 원은 썼을 거예요. 그렇게 1회를 마쳤습니다.
2018년 2회 프로젝트도 비슷하게 진행됐습니다. 홍보하고, 접수받고, 책 디자인하고, 인쇄하고, 시상식하고... 그때 인쇄비는 사비로 했던가. 가물가물하네요. 지원금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만하자, 그랬던 것도 같네요.ㅋㅋ 수상자들 선물은 상품권 3만원, 단행본 3권으로 1회 때와 동일했습니다. 응모작은 130편이 넘어서 1회 때의 두 배에 가까웠습니다. 아! 심사위원 한 분이 늘었는데(무보수로 도와주셨죠) 그분이 언론 홍보에 엄청 애써주셨던 게 생각납니다. 인천일보, 인천in은 인터넷 판에, 경인일보는 종이신문에도 실렸었어요.
2019년에는 나비날다책방 대표(청산별곡)님의 도움으로 500만원의 지원금을 확보했습니다. 해마다 10월이면 배다리에서 열렸던 책 축제와 연계, 하나의 행사로 자리 잡게 해주신 거죠. 그래서 상품권도 20만원 어치를 드릴 수 있었어요. 심사위원은 2회 때와 똑같았는데 처음으로 심사비를 20만원 정도 받은 것 같습니다. 디자인도 외부에 맡길 수 있었고요. 그럼에도 제 마음은 썩 편하지 않았는데 아마 고생하는(?) 청산별곡 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저지른 똥(?)은 내가 치워야 하는데...’ 내가 만든 프로젝트인데 사비를 쓰든 어디서 돈을 꾸든 내가 책임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오히려 청산별곡 님은 “이 프로젝트 같이 하는 거 아니었어? 게다가 나비날다책방이 후원인데 당연히 도와야지.” 말씀하셨지만요. 미안하고... 너무 고마웠죠.
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전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 중순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 패키지, 제주도 가족여행, 터키+그리스 자유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귀국 며칠 전에 외국에서 코로나 소식을 들었죠. 몇 번은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고요. 2월 말부터 한국은 물론 세계는 예측 불가의 모습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은 점점 단절, 고립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다니던 대학원도 지난해에 학기가 끝났고, 프리랜서니까 딱히 잘릴 일(?)도 없어서 예년과 마찬가지로 백수처럼 집에 있었습니다.ㅋㅋ
3월이 가고, 4월이 됐네요. 소설을 쓰며 살고, 살려고 여기저기에 강사 지원서를 냈습니다. 앗, 짧은소설 공모전은 어떡하지? 어떻게든 이어가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올해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인천문화재단에 ‘우주인 프로젝트’ 공지가 뜬 걸 보았죠. 거긴 2018년도에 지원했다가 떨어졌었기 때문에 내봤자 뻔하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앞섰지만 담당 직원이나 심사위원이 바뀐다면 어쩌면 붙을 수도 있었어요. 밑져야 본전이니(부끄럽긴 하죠-_-;;;) 내보자 싶었습니다. 2018년에 냈던 서류를 찾아보니 형편없더군요. 3년간의 경험도 있고, 이번에는 아주 구체적이고 성실하게 내용을 채웠습니다. ‘짧은소설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나이브하게 들릴까 봐 이름도 ‘십분발휘 짧은소설 공모전’으로 바꿨어요.
와우! 선정! 최대 300만원 지원이었는데 200만원을 준다네요. 내역서에 상품권 구입을 적었는데 상품권은 지원 불가 항목이라고 합니다. 200만원에 맞춰서(상품권 구입 비용은 빼고) 사용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심사위원비 약간, 디자인, 인쇄비로요. ‘우주인 프로젝트’ 지원자인 저는 한 푼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일은 제가 다 해야 했고, 상품권을 살 돈 50만원도 해결해야 했어요. 이메일 접수는 물론, 230편이 넘는 원고 1차 심사도 혼자 다 했습니다.ㅋㅋㅋ 2차 심사작 선정하고, 일정 잡고, 포스터 만들어서 심사 결과 올리고, 수상자들에게 메일 보내서 수정 원고 받고...
지난해에는 요일가게에서 시상식을 했는데 당선자 10명 중 9명이 찾아주셨어요. 어떤 분은 고속버스 타고 전주에서 올라오셨고, 어떤 분은 목발을 짚고 나타나셨습니다. 일을 마치고 조금 늦게 참석하신 어떤 분은 음료수 한 박스를 들고왔어요.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고 하면서요. 보잘 것 없는 공모전에 이렇게까지....라고 말하면 제 얼굴에 침 뱉는 거겠죠? 1,2,3,4회 수상자들에게 서운함을 안겨드리는 거겠죠? 자신 있게 자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얼굴 보고 책 나눠드리고... 30분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행사는 수상작가 님들이 이만 가보겠다고 얼른 일어서지 않는 바람에(!!)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어요. 그 중 한 분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하여 근처 식당에서 맥주도 한 잔 했네요. 그분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짧은소설 공모전은 귀하다고(?)... 오래 오래 공모전을 열어 달라고...
3회 당선작가들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올해 초 포항공과대학교에서 메일을 받았어요. 저보고 그 학교 학생들을 위한 글쓰기 가이드를(단행본, 이북 제작) 써달라는 거였습니다. 주제는 ‘미니픽션 창작법’. 내가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승낙했고, 이후 가장 먼저 떠올린 분들이 당선작가들이었습니다. 집필 계획도 짜기 전에 3회 수상작가 열 분에게 메일을 보내 ‘이런 이런 일을 하게 되어 이런 이런 질문을 던지니 답변 부탁드린다’라고 말했어요. 10명 중 9명에게 답장이 왔고, 한 분은 대답이 너무 짧아서 책에 못 실었지만 여덟 분의 이야기를 ‘미니픽션 창작법’ 부록에서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답례로 커피 쿠폰을 보냈을 뿐이네요.^^;;;
공개했다시피 올해는 230명이 넘는 응모작이 접수됐습니다. 기존의 3명 외에 새로운 심사위원을 초빙했고 긴장과 경청의 냉온탕 같은 심사 끝에 열 편의 당선작을 뽑았습니다. 글쎄요, 모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신난다고 답장 보내주신 분도 계시지만 그냥 감사하다고 한 분도 계시니까요.(표현은 성격이지 마음의 발현은 아니란 걸 압니다) 몇 번 주고받은 메일에서 저는 이런 질문과 부탁을 접했습니다.
- 책이 발간되면 일반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나요?
- 짧은소설 10편만으로는 양이 부족할 텐데 혹시 일러스트나 삽화가 함께 실리나요?
- 지난해 시상식 포스팅을 보니 작품집을 판매하신 것 같던데 올해도 그렇다면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책은 왜 착불로 보내주시는 거예요? 선불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 공모전 참가확인서를 떼주실 수 있나요?
죄송했고, 민망했습니다. 내가, 혹은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어요.(정식 출판물이면, 삽화를 넣으면, 저작권을 인정해주고 계약서를 작성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방적으로 내 처지만 생각했구나 하는 반성도 했습니다. 첫 해와 두 번째 해에는 선불로 잘 보내놓고 왜 착불을 언급했을까...(어떤 손해를 숨기고 있나. 어떤 인정을 바라고 있나...) 올해는 유난히 초,중,고등학생들의 응모가 많았습니다. 참가확인서를 제공할 만한 규모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든 성의껏 서류를 보내주었어요.
이런 건 사업가가 나서서 하는 게 맞지 않나? 한낱 개인이, 소설가라고는 하지만 이름 없는 내가 해도 되나? 기업을 등에 업지도 않고, 돈을 쓸 만큼 쓰면서 하지 못한다면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뭔가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밝히지도 않고, 알아주길 바랐는지도 몰라요. 주최자인 마음만만연구소, 후원으로 명시돼 있는 나비날다책방과 인천문화재단 때문에 ‘큰 행사’로 오해하신 분이 있다면 사과 말씀드립니다.
10월 10일 시상식은 줌zoom으로 합니다. 추석 특별방역 기간이라 어쩔 수 없이 변경했어요. 온라인 상으로 무슨 말을 할까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가 돼요. 요일가게에 오신다 해도 커피 한 잔 대접해드리는 게 다였을 테니까요. 큼지막한 꽃다발도 준비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도 얼굴 뵙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마음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합니다ㅋㅋ)
내년에도 할 수 있을까? 계속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하려고요. 역시 돈이 있어야 한다고 제가 저를 자꾸 세뇌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치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방법을 찾아야죠. 아니면 오해하지 않도록 작고 작은 공모전이라고 말해야죠. 사기 치지 않고(응?) 진심으로 하고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야죠.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크고 화려하지 않을 수 있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않으려는 이유. 사명감 같은 게 아니에요. 작품을 심사할 수 있는 기회를 쥐었다는 우월감에 빠져서도 아닙니다. 글쓰는 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니픽션 창작법’에 부록으로 실은 마지막 단락들을 옮기면서 글을 마칩니다.
*
백지 공포증. 문서 프로그램을 열기 전에 포털 창을 먼저 엽니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기사를 클릭한 뒤 줄지어 몇 개나 더 읽습니다. 지금 뭐하는 거야, 글을 써야지! 모니터에 띄워진 백지를 바라봅니다. 무엇을 쓸 것인지 한 달 전부터 고민했어요. 주인공 이름도 천 번 만 번 짓고 시공간적 배경도 확실히 구상해두었죠. 제목을 정하지 않으면 소설을 쓰지 못하는 성격이라 고심하며 결정한 제목을 문서 맨 윗줄에 적어둡니다. 한 줄 비우고 제 이름도 적죠. 이제 시작입니다. 첫 줄부터 차근차근 쓰면 됩니다. 커서를 따라 두 눈도 깜빡깜빡. 심장은 쿵쾅쿵쾅.
이제 보니 제목도 별로고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야심 있게 접근했던 주제도 시대에 안 맞는 것 같고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에피소드도 진부합니다. 공간이 너무 빤하고 익숙한 것 아니야? 전사(前史)가 길면 흐름이 늘어지잖아. 인물도 좀 많은 걸? 저를 꾸짖는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옵니다. 망했다. 이번 소설은 완성하지 못할 거야. 첫 문장도 쓰지 못한 채 포기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지난번 소설은 어떻게 썼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역시 난 재능이 없어…… 수시로 실망하고 자주 좌절감에 괴로워했던 시간이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텐데(웃음) 실패를 모르는 사람처럼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십분발휘’ 작가와의 만남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계속 써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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