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문학 읽기 마지막 시간.
오늘은 무려 H.G.웰스와 어슐러 K.르 귄의 작품을 읽고 이야기나눴다.
한 편씩밖에 못 봐서 아쉽긴 하지만... 대작가의 소설답게 겹이 많고 깊이가 있어서 토론작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누네스는 등반갔다가 조난을 당해 눈먼 자들의 나라에 떨어진다. 그는 소문으로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인간의 본능적인 속성으로 "눈먼 사람들 중에서 한쪽 눈이 보이는 사람이 왕이다"라는 옛속담을 떠올리며 어떤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눈먼 자들에게 자신은 '볼 줄 아는 사람'임을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난 보여요."
"보인다고?"
"그래요, 보여요."
"아직 감각이 완전하지 않군. 발에 걸려 넘어지고 의미 없는 말을 하니 말이야. 이 사람의 손을 잡고 안내해."
눈먼 자들은 누네스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누네스의 기대는 무너지고, 이곳에서 왕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한다. 그들을 없애려는 쿠데타(?)도 실패하고 만다. 위기가 찾아왔다.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여자에게 매일 '보이는 것''보이는 세상''본다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만 여자는 믿는 척 하면서 믿지 않는다. 여자도 다른 사람들처럼 누네스가 얼른 정상으로 회복되기를(눈이 멀기를) 바란다. 누네스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원한다. 마을 원로들은 이 문제에 대해 회의를 연다.
"그 사람은 뇌가 병들었네."
"얼굴에 살짝 들어간 부위가 생기게 하는 괴상한 눈이라는 병이 들어서 그의 뇌도 병든 거요. 눈 부위가 아주 넓게 확장했고 눈썹이 있으며 눈꺼풀이 움직인다네. 그 결과 뇌가 계속 과민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거네."
"내가 합리적으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완벽하게 치료하기 위해 간단하고 손쉬운 수술을 하면 된다는 거라네. 바로 이렇게 자극하는 부위를 제거하는 거지."
"그러고 나면 정신이 건강해질까?"
"완벽하게 건강해질 걸세. 그리고 모든 이가 감탄할 만한 시민이 될 거야."
수술하려고 했다. 눈먼 자가 되는 걸 받아들이려고 했다. 여자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살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누네스는 그럴 수 없었다.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본다'는 것을 기술로 본 것 아닐까,
인물이(누네스가) 미화된 것 아닌가,
눈먼 자와 눈뜬 자, 누가 더 우월한가, 혹은 행복한가, 하는 생각을 나눴다.
오랜만에(응?)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 소설을 분석해봤다.
발단:눈먼 자들의 마을에 눈 뜬 누네스가 도착한다
전개:왕이 되려고 하나 불가능을 깨닫는다
위기:야콥의 막내딸을 사랑하게 된다
절정:삶의 미학,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의 기쁨을 절절히 깨닫는다
결말:사느냐 죽느냐(눈이 먼 채로 사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H.G.웰스는 <투명인간>을 쓴 작가다. 그 소설은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 다뤘다.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대립되는 두 사람. 이 소설에서는 그걸 오감의 한 부분으로 좁혀 '눈=본다'와 연결시켰다. 이어지는 작가의 세계관을 추측해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투명인간>은 안 읽어봤는데 봐야겠다. 현대문학에서 나온 단편집도 주문했다.
<물건들> 어슐러 K. 르 귄
종말의 시대. 벽돌공이었던 남자가 '섬들'에 가기 위해 벽돌로 바닷길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섬들'은 사람이 살 수 있다고 알려진 미지의 나라.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꿈꾸고, 그걸 실천할 수밖에 없는 사람, 혹은 어떤 시절의 이야기. 묵시록적 시공간에 사유가 많아선지 읽기 힘들었다는 분도 계셨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가 생각났고, 시시포스 신화도 떠올랐다. 일견 무용한 행위 같지만 남자의 움직임은 희망의 몸짓. 어떤 시대에는 모든 희망이 판타지가 된다.
왜 물건들일까. 과부에게 아이가 전부인 것처럼 남자에게는 벽돌이 전부이기 때문. 그를 먹고 살게 한 밥줄이자 유일한 무기. 집 짓는 사람이 없어 벽돌이 쓸모없게 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걸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걸 등에 지고 바다에 빠트리는 일이었다. 꿈 속에서 본 장면처럼 물 속을 걸어야 했다. 물 속을 걸어서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벽돌은 그에게 생명이자 힘이고 믿음이자 구원이었던 것이다. 그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해도... 우리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물건이 있지 않을까.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이따금 하찮게 느껴지지만 그거 없이는 살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니, 남의 물건에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길을 찾고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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