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에 D-1
비상금을 깼다. 갔다 오면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직장도 없고, 겨울에는 일도 없다. ‘이런 상황이니까 갈 수 있는 거잖아. 잘 됐지 뭐야.’ 밝은 혼잣말도 웬일인지 위로가 안 된다.
여행 가서 뭘 하나?(여행을 하겠지) 돌아온 뒤에는 뭘 하지?(다녀와서 고민하면 되겠지)
20대에도, 30대에도, 40대에도 떠나는 데 죄책감을 갖지 않은 때가 없었다. 크고 작은 불안과 두려움이 가방 안에서 몽글몽글 돌아다녔다.
“계획된 여행... 어차피 갈 여행... 신나고 즐겁게 다녀와. 안 다녀오면 돈이 모아지는 것도 아니잖아. 사진도 얻고, SNS에는 상당히 잘나 보이고, 얼마나 좋니ㅋㅋㅋ 속이야 썩든 말든...” 친구는 후회하고 자책하는 나를 묘한 관점에서 지지한다. 내 답글은 애처롭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며 살아온 인생이 아닌데 요샌 왜 이렇게 버리고 싶은 게 많은지 모르겠어. 죄 싸구려들.” 몇 시간 후 친구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나도 너랑 같은 과야. 조용히 혼자 용기 내서 사는 사람.” 나는 피식 웃고 만다.
떠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늘 여행가방보다 용기를 먼저 꺼냈다.
내가 밟을 수 있는 땅의 크기를 나의 크기로 여겼다. ‘탈 것’은 버스나 지하철에 한정돼 있었다. 기차나 배를 타는 일에는 ‘철저한 계산’이 필요했다. 하물며 비행기야. 거길 갔다 오려면 얼마가 들지? 얼마나 있어야 하지? 마음이 먼저 주저앉았고, 다리가 포기했다. 활발하게 돌아다니지 못했다.
여행은(특히 해외여행은) 돈이 있어야 간다는 의식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돈보다 행복, 돈보다 경험, 돈보다 시간을 좇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여행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떠나는 자에게는 남다른 마인드가 필요하다.
여행을 사고할 때 기대나 설렘 같은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간다. 왜 떠나야 하는데? 라고 물으면 마땅한 대답을 꺼낼 수 없다.
***
우리는 언젠가 죽지만 또 언제까지나 산다. ‘언젠가’는 짧고 ‘언제까지나’는 길다. 죽음 앞에 붙은 가정보다 삶에 달라붙은 당위가 더 기니까, 긴 걸 붙잡고 산다.
어떻게 살아야할까. 해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밤마다 자문했다. 잘 살았나? 오늘도 잘 지냈나? 내일은 잘 할 수 있을까?
내게 소설은 무엇인가. 삶의 배경? 앞잡이? 틈? 목숨? 어쩌면 여행 같은 것일까. 거리를 두고 떠났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슬며시 다시 돌아오는 것. 소설을 삶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독백 같은 글쓰기를 해왔다. 별로 사랑받지 못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삶을 살고 싶다. 내 글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이런 생각을 품고, 또 한번 간다.
'작가의일상 > 여행과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이 싫다는 새파란 거짓말-2 (0) | 2020.01.28 |
---|---|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12일:그리고 남은 이야기 (0) | 2020.01.28 |
[노랑풍선]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나의 쇼핑 (0) | 2020.01.11 |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