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룸메 씨
브리지 끝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다들 검정 계열의 재킷을 입고 있는 탓인지, 낯선 나라에 있다는 긴장 때문인지 낯빛이 밝지 않다. 나는 노란색 깃발을 들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내가 입술을 떼기 전에 여자가 먼저 내 이름을 확인한다. 내가 그룹의 마지막 멤버인 것 같다. 깃발을 든 인솔자가 스물다섯 명을 네 그룹으로 나누겠다며 이름을 부른다. 이름 끝에, 인솔자는 나와 방을 함께 쓰게 될 룸메 씨를 소개한다. 60대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다. 우리는 가볍게 목례한다. 중년은 내게 다가와 “젊은 사람이랑 방을 같이 쓰게 됐네요. 열심히 따라 다닐게요”라고 말한다. 나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예의 없게 굴려는 마음이 없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건 지적해야 한다. “저 젊지 않아요.” 중년이 내 이름을 확인하고, 우리는 나란히 걷는다. 환승 검색대까지 가는 동안 중년은 내게 하는 일, 사는 지역, 나이, 결혼 유무를 묻는다. “친구들이 전부 스페인에 갔다 와서 함께 가자고 할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전 친구가 없어서 혼자 왔어요.” 중년은 아까부터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재은 씨. 나는 아직 룸메 씨의 호칭을 정하지 않았다.
“저 안 젊어요.”, “전 친구가 없어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기 드러내기를 싫어하면서 왜 우연한 순간 불쑥불쑥 성격을 노출하는 걸까. 성격이 아니라면 감정인가? 외롭다는 호소?
룸메 씨는 대전에서 왔고, 전직 공무원이며,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한다.
*** 산악열차 안에서
혼행자에게 카메라만큼 좋은 친구는 없다. 카메라를 든 나는 적극적으로 여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큰 카메라는 나의 동작을 과장한다. 몬세라트에서 내려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지하로 향하는 길, 일행들은 내게 사진 많이 찍으셨냐고 다정하게 말을 붙인다. “다 지울 게 빤한데 그냥 찍었어요.”, “막 찍는 거죠 뭐.” 웃으려고 애쓰다가 입술이 비뚤어지고, 민망한 나는 괜히 플랫폼을 두리번거린다.
-좋은 카메라 가져오셨네요.
-좋은 건 아니고 무거운 거예요.
그들에게 하지 못한 말. “이걸로 시간 때우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멍해 보이잖아요. 때때마다 사색에 잠길 수는 없으니까요.”
여행 첫째 날, 아직은 룸메 씨와 주거니 받거니 촬영 품앗이를 하기 전이다. 일행 중 한 명이 내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남자는 내게 DSLR을 건네받고 이렇게 저렇게 작동한다. 기기를 모르는 눈치길래 나는 셔터와 줌 조절하는 법을 알려준다. 남자는 셔터에 손가락을 댔다가 떼고, 줌렌즈를 돌려보더니 발을 옮겨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다가온다. 나는 관광객들을 피해 그의 피사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표정을 정리한다. 나는 사진 찍을 때 웃지 않는다. 웃으려고 노력해도 입매가 도통 올라가지 않는다. 낯선 사람 앞에 선 나는 더욱 긴장한다. 햇볕이 눈을 찌르는 밖이 아니라 어두운 실내라는 게 안심이 된다. 남자는 두어 번 셔터를 누르더니 내게 카메라를 돌려준다. “이거 어려워서 못 찍겠네.” 나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호의였음을 안다. 계속 내게 카메라를 건네받았다간 함께 여행 온 아내에게 야단맞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의 접근이 달갑지 않았다. 그의 배려를 온화하게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다. 찍어주지 않아도 된다. 남자가 찍어준 사진이 카메라에 담겨있을 줄 알았다. 메모리카드에 나는 없다. 남자는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찰칵, 묵직한 셔터음을 듣지 못한 것 같다. 찰칵, 자물쇠가 걸렸다 풀리는 소리가 들렸어야 하는데.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은 것이다. 휴대전화 터치감에 익숙해진 탓일까. 손을 댔지만 작동까지는 이어지지 않은 게 틀림없다. DSLR에 대해 모르면 그럴 수 있다. 6년 전에 중고로 산 Mark II는 그때도 이미 출시된 지 10년이 넘은 제품이었다. 유별난 고집쟁이나 가난뱅이가 아닌 이상 이렇게 큰 카메라를 들고 패키지여행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포카메라라고 불리는 Mark II, III 시리즈는 한때 사진가들의 간지를 세워줬다. 성능 좋고 가벼운 미러리스가 등장하면서 존재감을 상실했다. 나는 카메라를 바꿀 능력이 없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조용 조용 찍은 사진은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았다. 찰칵, 하는 셔터음으로 내 여행을 명랑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걸쳐 든 어깨의 부담 때문에 나는 좀처럼 명랑해지지 못했다.
*** 관광지에서
패키지여행에는 수신기가 필수다. 눈으로 팀을 좇고, 소리치는 일 없이 가이드가 소형 마이크에 입을 대고 속삭이기만 하면 기계를 통해 일행에게 전달된다. 관광객들은 여행사가 제공한 수신기에 이어폰을 꽂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수신기를 분실하면 보상금이 10만원이라고 했었다) 가이드가 보이지 않아도, 그와 사이가 벌어져도 괜찮다. ‘사람’보다 ‘말’을 따르면 된다. 가이드도 팀원이 잘 따라오는지 자주 뒤돌아볼 필요 없이 자기 길을 간다. 해야 할 이야기를 기계처럼 전한다. 새 소리도, 그 나라의 언어도 들리지 않는다. 두 귀는 이어폰으로 막혀 있다. 나는 끊임없이 한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 데 피곤함을 느낀다. 귀에서 얼른 이어폰을 빼고 싶다.
*** 숙소에서
저녁식사 후 룸메 씨는 베개 두 개를 겹쳐놓고 침대에 등을 기대고 누워있다. “열심히 글 써서 돈 많이 벌어. 훌륭한 작가가 돼야지.” 룸메 씨가 말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흐흥, 소리를 낸다. 그래야죠, 라는 뜻인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여긴 건가? 상투적인 말을 비웃은 건 아닌가?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다. 커어엉 킁, 코 고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룸메 씨는 금세 잠에 빠져 있다.
낮에 룸메 씨는 내게 알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뭘 보고 알았을까? 인터넷에서 구입한 '노브랜드' 가방과 오래 입어 털이 죽은 파카? 서로 다른 이름의 화장품 샘플을 봉지에 잔뜩 넣어온 것? 아직 여행 2일차고 나는 ‘알뜰하게’ 소비하는 행위를 내보인 적이 없다. 어쩌면 ‘알뜰’은 가난해보인다는 뜻이 아닐까? 운전기사에게 500미리 생수 1병을 1유로 주고 사는 게 비싸다고 말해서일까? 정말로 수돗물을 끓여 먹으면 안 되는 걸까요, 라고 물은 데서 나의 경제 관념을 유추한 걸까?
*** 버스에서
인솔자가 전체 일정을 안내하고 선택 관광에 대해 설명한다.
“한 도시에서 가장 포인트 될 만한 걸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시는 게 좋아요. 다 하신 분들은 여행의 만족도가 높습니다.”
“선택관광은 의무는 아니지만 권리입니다”
여행지에서 의무와 권리에 대해 듣게 될 줄 몰랐다.
선택관광을 전부 ‘선택’하지 않은 나는 패키지 여행자의 권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은 건가.
*** 안전에 대하여
버스를 타면 안전벨트부터 맨다. 걸을 때 가방은 가슴 앞에 둔다. 백팩은 프론트백이 된다. “여권과 현금 등 귀중품은 숙소에 두지 말고 언제나 몸에 지니세요.”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갈 때도 가방을 들고 간다. 이때만 백팩은 백팩이 된다.
*** 그라나다 야경 투어에서
선택관광 50유로. 맥주 한 잔과 타파스가 포함된다고 한다. 패키지 ‘팀’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야경 투어 후 선술집에 간다고? 모르는 사람과 멀뚱멀뚱 마주앉아 맥주를 마시기보다 혼자서 즐기는 게 낫지 않을까? 가지 말까? 밤의 알함브라 궁전과 옛 골목이 궁금하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해야 한단다. 그 도시의 지리와 환경을 아는 사람이 데리고 가야 한단다. 나는 맥주가 앞에 놓였을 때 무리해서 앞, 뒤, 옆 사람과 대화하기보다 지금 내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를 좀 더 염두에 두기로 한다. 그러면 금세 괜찮아질 것이다. 직시. 바라보기. 바라보는 시간에는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 버스에서
운동화를 벗고 양반다리를 한다. 의자 다리의 높이와 앉아 있는 나의 종아리 길이는 잘 맞지 않는다. 버스에서뿐만 아니라 작업실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카페에서도 나는 의자에 앉으면 다리를 꼰다. 혹은 양반다리를 한다. 그 자세는 척추를 자극하고 허리에 무리를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의자 다리가 짧아지거나 내 다리 길이가 길어지지 않는 한 습관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 뒷좌석에서
무장해제라는 단어가 들렸다. 문득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이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 버스에서
지난겨울 발리 사건(?) 이후 나는 이제부터 패키지만 가고, 가더라도 혼자 방을 쓸 거라고 결심했다. 내가 (여행지에서 함께 생활하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행사에 상품을 신청할 때 나는 룸조인을 원했고, 상대가 여행을 취소해 혼자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자 당장 전화를 걸어 아쉬움을 표했다. 룸조인을 하지 않으면 전체 여행 경비의 4분의 1 가량을 더 부담해야 했다.(50만원 남짓) 내게는 무리였다.
가기로 마음먹은 여행을 취소할 순 없지. 가자. 밤에도 철저히 혼자가 되자. 혼자 방을 쓰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일행들과 헤어져 밤시간 만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돈을 쓰자. 눈치보지 말고 호텔에서의 밤을 편하게 보내자. 뒤늦게 신청한 누군가와 한 방을 쓰게 됐다는 연락을 받자 나는 실망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통장 잔고가 불어난 느낌이었고 없던 돈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발리 사건의 당사자에게 “좋은 사람이 뭔데? 그냥 너대로 살아.” 라는 말을 들었다. “좋은 사람 되긴 글렀어.” 패키지의 매력을 아직은 모르겠다. 친구를 사귀어서 동유럽은 자유여행으로 가야겠다.
*** 로비에서
조식을 먹다가 미미 씨가 암스테르담 일일투어를 혼자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일행과 같이 하는 선택관광을 신청하지 않고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과(렘브란트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근처 재래시장, 중앙광장과 중앙역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코스를 잡았다고 한다. 룸메 씨는 2년 전 베네룩스 3국을 여행했고 우리의 선택관광 코스를 이미 경험한 바 있다.(풍차와 치즈 공장, 다이어몬드 숍 등등) 공항에서 혼자 12시간을 대기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관광을 신청했지만 룸메 씨는 미미 씨의 계획에 더 끌린다고 말했다. 미미 씨는 저랑 같이 가요, 룸메 씨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인다. 나도 미미 씨 일정에 끌렸다. 나와 룸메 씨는 인솔자에게 암스테르담 선택관광 취소 의사를 표명한다. 인원수를 변경하려면 그쪽 담당자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했다. 몇 시간 후 답변을 받는다. 그렇게 나와 룸메 씨, 미미 씨는 일행과 떨어져 따로 암스테르담 시내에 나갔다오기로 한다.
나는 이런 선택과 결정이 좋았다. 12일 일정에서 단 몇 시간이라도 무리에서 빠지게 된 것에 해방감을 맛보게 될 것 같았다. 25명도 무리, 3명도 무리지만 수가 적은 쪽이 아무래도 덜 무리답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일탈을 얻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인솔자는 눈웃음을 거뒀다. 팀원의 선택관광은 추가 수입으로 잡힌다고 들었다. 그는 내가 얻은 일탈이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나는 미미 씨가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 혼자 가고 싶었는데 우리가 귀찮게 하는 거 아니에요? 라고 물으면서도 너가 이상한 사람이 아닐지 걱정돼, 하는 마음이 미세먼지처럼 부유했다. 나는 그런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 숙소에서
룸메 씨가 몇 년 전에 갔던 제주여행 이야기를 했다. 친구와 패키지 신청해서 돌았는데 가이드가 쇼핑하지 않는 그들에게 눈치를 줬다는 것이다. 평소 몸이 좋지 않았던 친구가 고가의 상황버섯을 구입하자 그때부터 얼굴의 근육이 말랑말랑해졌다는 이야기. 룸메 씨는 그 여행이 끔찍했다고 했다.
나는 선택관광을 다 ‘선택’할 생각이 없는 내 결정이 누군가의 수익을 낮추고, 희망과 미래를 깎아먹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균열을 내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여행이 처음이라 나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인솔자가 말한 ‘의무가 아닌 권리’에는 어느 정도의 책임이 따르는 걸까.
사람들은 대개 “내가 언제 여길 다시 오겠어?”라는 마음으로 마차를 타고, 뚝뚝이를 타고, 플라멩코를 보고, 야경 투어를 한다. 하지만 죽기 전에 그걸 꼭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권리’는 없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무리에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세비야의 거리를 귀족마차로 이동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플라멩코 관람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하고 유튜브 영상에서 자극을 받으려고 해도 역시 안 끌렸다. 나는 7개의 전체 옵션 중 4개를 취하고 3개는 버렸다.
*** 휴게소에서
우리의 관광버스는 두 시간을 달린 뒤 15분 휴식해야 한다. 기사도 기사지만 버스에 주행거리와 운행시간이 표시되고, 스페인은 운전자의 노동시간을 철저하게 체크한다. 과노동 했을 경우 벌금을 물어야 하고 그 돈은 운전자의 두세 달 급여가 될 만큼 작은 돈이 아니다. 예전에는 간이휴게소에 정차해 차를 마실 사람은 마시고, 화장실을 이용할 사람은 이용했지만 여행객이 늘어나는만큼 매출이 비례하지 않으면서 화장실 사용비용을 요구하는 오너가 생겼다고 한다. 인솔자는 휴게소에서 초콜릿이라도 하나 사줄 것을 부탁한다.
나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사용 대가로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오전에 호텔에서 이미 두 잔이나 마셨지만 구름 많고 안개비가 흩날리는 창밖을 보며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한다. 간이 휴게소였는데도 커피는 잔에 담겨 나왔고 나는 그게 고맙다. 사실은 마셔주는 거라서 나는 금세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버스 탑승 시간이 가까워져와서 음미할 시간도 없이 에스프레소를 마셔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혀 끝에 닿는 맛은 좋았지만 빈 잔을 바라보자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화장실 비용을 정당하게 지불하는 게 나은지, 이용자의 주관에 맡기는 것이 나은지. 나는 의견이 없다. 오너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여기는 여행지다. 확률을 따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나 같은 여행자뿐 아니라 오너도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머릿속에서
내가 인솔자라면 선택관광 참여자가 적어서 자신의 수익이 줄어드는 것보다 일행들이 자신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에 서운함을 느낄 것 같다. 내가 전한 메시지를 수긍하지 않거나 의문을 가졌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
“플라멩코는 블로그 같은 데 후기를 보고 안 하신다는 분이 많은데 직접 보신 분들은 후회 안 하십니다.”
“세비야 귀족마차 같은 경우 광장이 굉장히 넓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습니다. 안 하게 되면 저랑 같이 한참을 돌아 걸어야 해요. 무척 지치실 거예요.”
나는 인솔자를 힘들게 할 속셈을 가진 사람이 돼버린 것인가. 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싶었던 것뿐인데.
*** 못생김에 대하여
여행지. 패턴의 변경. 혼자가 아님. 변비와 부종으로 고생한다. 개운치 않은 날이 많아진다. 귀찮아서 꾸미지 않는다. 편한 옷, 편한 신발을 선호한다. 평소에 안 입는 것만 챙겨왔다. 싸구려들이다. 사진 찍히기를 거부한다. 게을러보이고 못생겨보인다. 자기관리 안 하는 사람처럼. 나는 끊임없이 수첩에 뭔가를 적고(방문 장소와 지출내역) 영수증을 모은다. 탈출의 증거를 모은다.
*** 버스에서
시간을 잘 지키주십사 당부하면서 인솔자는 “누군가의 1분은 팀의 25분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 아니지만 묘하게 설득된다.
*** 사라고사 성당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은 하늘을 소유한다는 것일까. 천장화, 높은 곳에 있는 조각과 벽화를 보느라 목이 아프다.
*** 버스에서
사람이 말을 한다.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어젯밤에 잠 못 주무셨어요? 왜 이리 피곤해보이세요? 다들 눈을 감고 계셔서...” 인솔자는 신나게 말할 의지를 잃는다. 그래도 일정을 설명하고, 선택관광을 유도하고, 스페인어 몇 마디를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올라. 고맙습니다, 그라시아스. 안녕히 계세요, 아디오스. 에스프레소는 카페 솔로. 아메리카노는 카페 , 카페라떼는 카페 레디즈.
*** 버스에서
예전에 배낭여행을 좀 다녔다. 인도와 아시아 지역을. 백패커라는 단어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갖고 있다. 3년 전 라다크에 갔을 때 여행사 안내 메일에 배낭보다는 캐리어,라고 적혀있었음에도 배낭을 메고 갔다. 엄청 고생했다. 짚차로 이동하는 일정에 굳이 배낭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캐리어를 수하물로 부치고 비행기를 타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 버스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버스 안. 몇 분 후면 한국은 새해를 맞는다. 몇몇 사람에게 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여기 시간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는다. 어차피 빤한 문자를 치게 될 거야. 핸드폰을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 시간으로 ‘새해’를 앞둔 시간에도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시간이 지나버린 후일 테니까. 충분한 시간이라는 게 있을까? 내 마음이 흡족한 때?
*** 휴게소에서
‘넌 뭐가 그렇게 맺힌 게 많아?’
버스가 잠시 정차한 사이, 돌 반 흙 반인 산을 바라보다가, 그 속에 돌기처럼 솟아있는 초록색 나무들을 보다가 문득 자문한다. 심술궂은 목소리다.
그 말은 넌 왜 그런 이야기밖에 생각해내지 못해? 라는 뜻이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를 고민한다. 내 것이 분명한, 나만의 이야기를. 그리고 인정받고 싶다.
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너무 관습에 얽매여 있어. 한 발짝 앞으로 내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며칠 째 고민하고 있잖아. 재미없게. 인연을 끊자.
*** 숙소에서
“돈은 거짓말을 안 해.”
룸메 씨 친구가 한 말이고, 그런 룸메 씨의 친구는 ‘럭셔리 패키지’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녀는 일반 여행사 상품보다 3-4배 정도 비싼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나도 한 번 따라가봤는데 남들 안 가본 데 가고, 좋은 호텔에서 자고, 맛있는 거 먹고 좋긴 좋더라.”
부자들은 사람과 부딪치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쓴다. 그렇지 않은 ‘일반 패키지’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 있다. 심지어 우리는 덩어리다. 25명이 우르르(가이드,인솔자까지 27명) 몰려다니고 식당에 가면 한국 단체여행객들로 붐빈다. 같은 그릇과 수저가 수십 개 늘어서있는 걸 보면 기가 질린다. 자리는 얼마나 좁은지. 가방 놓을 공간은커녕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충고 때문에 가슴 앞으로 끌어안고 밥을 먹어야 한다. 다들 식사는 왜이리 빨리 하는지... 진짠지 가짠지 내내 속이 더부룩했다.
*** 버스에서
“축복받으신 거예요.”
오늘부터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가 버스에 탔다. 우리팀이 뭔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반복해서 한다. 세뇌당하는 기분이다. “1월 1일에 꼬마기차 운행 안 했었는데 오후부터 한다고 해요”(톨레도)
말이 많다.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아요.”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 다들 그 정도쯤은 생각하고 오지 않았을까. 순간순간을 즐기라는 말일 텐데, 내게는 순간 순간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만 같다. 아침부터 귀가 쉬지 않고 팔딱거린다. 피곤하다.
“한국인은 가성비를 따지잖아요. 여행에서 따지는 것 중 낸 돈 이상으로 뽑을 수 있는 건 다 하세요. 순간을 즐기세요.”
“야, 고생만 죽도록 했어. 힘들었어.” 라고 여행사 홈페이지에 적는 분이 계신데 여행의 묘미를 알려면 그 순간, 그 장소, 그 시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 해요. 해볼 거 다 해보고, 먹을 거 다 먹어보고...“
프라도 미술관에 못 가는 대신(1월 1일 휴관) 산미구엘 시장, 레알 마드리드 축구장, 마요르 광장에 간다고 한다. “이전 팀은 경험하지 못했던 마드리드를 즐기실 수 있어요. 행운을 즐기십시오.”
행운을 즐기십시오! 행운을 즐기십시오! 간호사가 치료를 위해 주사기의 피스톤을 민다면 가이드는 여행자에게 ‘만들어진 행운’을 주입하기 위해 마이크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 축구장 앞에서
가이드 “두 분이 모녀 사이이신 거죠?”
룸메 씨 “아니요. 아니요, 룸메예요.”
나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이드 “근데 벌써 이렇게 친해지신 거예요?”
룸메 씨 “어쩔 수 없이 같이 지내야 하니까...”
나 “......”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 아니라 몰랐던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문법에 어긋난 말을 해버렸다. 기억 속에서 혼자 삭제-수정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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