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 문학 필사는 '소설의 첫 문장, 첫 문단'으로 시작합니다. 2023년 1월에도 이런 테마로 한 해 필사를 시작했는데 그중 두 편을 소개합니다.
이런저런 단체에서 필사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잖아요. 참여비를 내고 필사 모임에 참여한다면 진행자가 올리는 글을 따라쓰는 게 포인트일 텐데 나는 어떤 차별점을 갖고 있을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음... 단순히 '좋은 글'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닌 저만의 '문장에 대한 짧은 생각'을 더한다는 게 다른 것 같아요. 기존 작품의 발췌문보다 덧붙인 생각을 읽는 게 좋다고 피드백해준 분도 많았고요.ㅎㅎ 필사 글을 베껴적는 데 대략 10분, 문장에 대한 짧은 생각을 읽는 데 5분, 하루 15분, 새롭고 낯선, 불편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경험해보세요.
1.
막심 고리끼, 『어머니』
매일 노동자 마을 위로 탁하고 기름진 공기 속에 공장의 사이렌 소리가 떨면서 울려 퍼지자 그 부름에 응답하듯 조그만 회색 집들에서 아직 충분한 잠으로 근육을 풀지 못한 음울한 사람들이 겁먹은 바퀴벌레처럼 거리로 나왔다. 차가운 어스름 속에서 그들은 비포장도로를 걸어 높이 솟은 돌 감옥과 같은 공장을 향해 갔고, 공장은 수십 개의 기름 낀 네모난 눈으로 더러운 거리를 밝히며 무심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기다렸다. 진흙이 발밑에서 쩔꺽거렸다. 잠에 취한 이들이 목쉰 소리로 고함을 질렀고 거친 욕설이 화난 듯 공기를 갈랐으나 사람들 앞에는 또 다른 소리들이 떠다녔다 – 시끄럽고 육중한 기계 소리, 으르렁거리는 수증기 소리, 높고 검은 굴뚝들이 마치 굵은 몽둥이처럼 마을 위로 솟아올라 음울하고도 엄하게 내려다보았다.
저녁에 해가 기울고 집의 유리창에 붉은 햇살이 지친 듯 반짝일 때면 공장은 돌로 된 용광로에서 타고 남은 재를 털어 내듯 사람들을 끄집어냈고 그러면 그들은 그을음에 뒤덮인 새까만 얼굴로 공기 속에 기계 기름과 끈적한 냄새를 퍼뜨리면서 차가운 치아를 반짝이며 다시 거리를 걸어갔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고 심지어 기뻐하는 것 같았다 – 오늘 하루치의 형벌과도 같은 노동이 끝났고 집에서는 저녁 식사와 휴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하루는 공장이 잡아먹었고 기계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힘을 사람들의 근육에서 빨아먹었다. 하루가 흔적 없이 삶에서 지워졌고 인간은 무덤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휴식의 달콤함과 연기 자욱한 술집의 기쁨뿐이었다. 인간은 그것에 만족했다.(pp.9~10)
정보라 옮김, 『어머니』, 을유문화사, 2022.
*문장에 대한 짧은 생각
1. 노동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2. 공장과 관련된 묘사를 한 번 더 살펴볼까요? “수십 개의 기름 낀 네모난 눈으로 더러운 거리를 밝히며”, “시끄럽고 육중한 기계 소리, 으르렁거리는 수증기 소리, 높고 검은 굴뚝들이 마치 굵은 몽둥이처럼”, “돌로 된 용광로에서 타고 남은 재를 털어 내듯”, “ 기계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힘을 사람들의 근육에서 빨아먹었다” 등등.
3. 노동자는 겁먹은 바퀴벌레처럼 거리로 나오고, 그을음에 뒤덮인 새까만 얼굴로 공기 속에 기계 기름과 끈적한 냄새를 퍼뜨리고, 하루치의 형벌과도 같은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노동자 마을은 탁하고 기름진 공기 속에 있네요.
4. 「달밤」, 「복덕방」의 작가 이태준은 막심 고리키를 두고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먼저 훌륭한 문장가였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도 가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먼저 가치 있는 문장부터 소유한 것을 나는 고리키에게서 느끼었다.”라고 『무서록』에서 언급했어요.
5. 막심 고리키(1868~1936)의 본명은 페슈코프입니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열두 살 때 구두 수선공을 시작으로 접시닦이, 심부름꾼, 수위, 부두 노동자 등을 전전했다고 전해집니다.
6. 1892년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데 막심은 ‘엄청난, 가장 큰’, 고리키는 ‘쓰라린, 비참한’이란 뜻입니다.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은 ‘엄청난 쓰라림과 고통받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고난에 찌든 러시아 민중의 고통을 짊어지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2.
김중혁, 「휴가 중인 시체」
버스에다 전 재산을 싣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누군가 그 사람을 취재해보면 어떻겠냐고 말했고, 나는 건성으로 들었다. 그런 사람은 흔하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 얘기만 들어도 견적이 나와. 보지 않았는데 얼굴 생김새도 그려져. 수염도 좀 있겠지. 옷 스타일도 알겠고. 인생은 여행이라고, 낭만은 바다에 있다고 생각하겠지. 내 생각과는 다를 거라는 말을 다시 들었지만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다른 일에 몰두했고, 석 달이 지난 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그 사람을 보게 됐다.
생각과는 달랐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그는 웃지 않았다.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리포터는 버스 안의 물건들에 감탄하면서 설명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덕분에 방송은 짧았다. 기이한 사람들을 짧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원래는 좀더 긴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유독 짧게 느껴졌다. 그 사람의 얼굴이, 특히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물어물어 연락처와 현재 위치를 알아냈다. 연락부터 할까, 직접 찾아가볼까. 연락을 먼저 한다면 예의를 갖출 수는 있어도 방어벽이 생긴다. 얼굴 뒤편의 표정은 전혀 보지 못하고, 꾸며낸 표정만 보고 올 확률이 높다.(문단 하략) (pp.165~166)
『스마일』, 문학과지성사, 2022.
*문장에 대한 짧은 생각
1. 첫 문단에서 어떤 편견을 드러내고, “생각과는 달랐다.”로 두 번째 문단을 시작하면서 짐작과는 달랐던 누군가를 설명합니다.
2. 편견과 고집스러움을 “내 생각과는 다를 거라는 말을 다시 들었지만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로, 예상 밖의 충격과 인식의 변화를 “그 사람의 얼굴이, 특히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첫 문단을 다시 보세요. 비교적 긴 시간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해 듣고, 그를 판단하고, 생각을 고치지 않고, 그를 우연히 봅니다. 빠른 전개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4. “얼굴 뒤편의 표정”, “꾸며낸 표정”은 사회성, 가면, 정치적, 예의 같은 단어를 떠오르게 하네요.
5. 김중혁 작가의 에세이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자이언트북스, 2021)에는 ‘잘 살기 위한’, 아니 즐겁게 살기 위한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단어 하나를 선택하고, 그 단어가 들어가는 문장을 하루 종일 생각해 보자’라는 챕터에는 이런 내용이 있네요.
“오늘은 어떤 단어로 해 볼까. 눈을 들어 책장을 보니 『소설가의 각오』(문학동네, 1999)라는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이 보인다. ‘각오’라는 단어를 하루 종일 굴려 보도록 해야겠다. … ‘각’에는 정말 각이 많다. 기역이 두 개나 있어서 융통성이 없어 보인다. 각이 살아 있다. ‘오’는 감탄사로도 쓰이고 숫자 5의 뜻도 있고, 고개를 살짝 돌리면 ‘어’가 되기도 한다. … ‘각오를 다진다’는 표현을 쓴다. ‘다진다’라는 표현을 보면 마늘을 다지거나 커피를 탬핑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마늘을 다지는 것처럼 각오를 잘게 자르면 어떻게 될까? … 나는 각오를 다졌다. 거대한 각오, 무시무시한 각오가 있었는데, 그걸 잘게 부수고 쪼갰더니 작은 각오가 되었다. 마늘을 다지듯 각오를 다졌더니, 어디에나 쉽게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큰 각오보다는 작은 각오로 분리 보관하여 냉동실에 넣어 두면 좋겠다.(하략)”
2025년 1월~2월 주제별 필사 "소설의 첫 문장, 첫 문단"
https://theredstory.tistory.com/1792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문학 필사
#손으로꿈을쓰다 #소설필사 #시필사 #글쓰기올해 2개월 단위로 진행했던 주제별 문학 필사를 내년에도 이어갑니다.2025년도 첫 타이틀은 "소설의 첫 문장, 첫 문단"이에요. 2023년 1월에 비슷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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