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글에 두서가 없는 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없는 매일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또한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몰라 선생님이라 칭하고, 그에 걸맞게 경어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아니, 방금 했던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에 대해 애초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가 거만했습니다. 물론 함께 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도 마찬가지실거라 감히 짐작합니다.
저희가 떨어져서 살게 된 것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입니다. 저는 그로 인해 불편함을 겪고 있지만 아마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고 계실 것 같아 섭섭할 따름입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께서 바보 취급하시던 무리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바로 그 테니스 동아리입니다. 어느새 회장직까지 맡게 되었으니 무리의 변두리에 속한다는 게 더 이상하겠죠.
이곳에 들어오던 날을 기억합니다. 처음부터 선생님께선 탐탁치 않아 하셨습니다. 글을 써야한다.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은 없다. 어떤 작가처럼 하루 4000자, 화가처럼 하루 한 점 정도는 창조해내는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적은 양 같아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우리는 생활을 이어 나가기 위한 아르바이트, 미래의 건강을 위한 운동 또한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제 생각은 똑같습니다. 꾸준히 쓰는 것이 어찌 예술이 된다는 말입니까? 운동, 아르바이트 같은 눈에 보이는 종류의 일은 분명 꾸준함이 미덕입니다. 운동이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노력이고 아르바이트는 현재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예술을. 우리가 읽고 쓰고 그리는 것을 고작 노력 정도의 일로 치환하려 하십니까? 예술을 천재들만의 것이라 칭하진 않겠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천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선생님께서도 부정하지 못하실거라 생각합니다. 함께 있을 때 이런 말을 하면 약간의 조소와 함께 “내가 왜 부정하지 못할거라 생각하지?” 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만큼은 일방적으로 제 생각을 전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선생님만큼의 인물이 되지 못하는지라 아직 선생님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 만큼은 알아주셔야 합니다. 저는 천재의 이름을 띈 범인이고, 선생님은 범인의 이름을 빌린 천재라는 것.
그 증거로 선생님이 떠난 후 제게 있던 아이디어는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끔씩 떠오르던 번쩍이는 생각들. 우연과 상상의 산물, 자기 직전 머릿속에 떠오르던 것들. 전혀 상관없는 일에서 창조된 나의 말들. 그런 것들은 저와 먼 곳의 이야기가 되었고 써냈던 이야기들을 봐도 이것을 정녕 내가 만든 것인지 어색하기만 합니다. 가끔은 다 읽고 나서야 내 이야기였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내밀한 고백으로 대중을 계몽 시키겠다는 원대한 목표는 이제 내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저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습니다. 저희는 같은 것을 먹고 같이 테니스를 쳤더랬죠. 선생님이 떠난 후 이 이야기들이 제 것이 아닌 선생님 것이라 느끼듯이 아마 선생님께서도 그것들이 제 것이라 느끼실 겁니다. 그래요, 다시 테니스 동아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희가 유일하게 공유할 수 있었던 취미는 테니스였습니다. 정확히 몇 살 때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만큼 오래된 취미입니다. 저는 공이 어디로 날아오는지 보고 그것을 받아내는 단순한 행위에 집중했다면 선생님께서는 서브, 포핸드, 백핸드, 발리, 하프 발리, 스매시, 드롭샷, 로브 등 기술들의 명칭을 정확히 알고 숙달되길 원하셨죠. 집중하는 것이 달랐던 만큼 받아들여지는 의미도 달랐습니다. 제가 단순히 휴식으로써 테니스를 향유했다면 선생님께는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으로써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테니스로 쌓인 스트레스는 테니스로 풀렸죠. 처음 선생님께서 다이빙 샷을 했던 날을 기억하시나요? 그 아름다운 리턴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기는 졌더랬죠. 자기 몸을 끔찍이도 생각하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아직도 그 날 집에 돌아오는 날에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내가 널 이겼어.” 물론 그것이 테니스 이야기가 아님은 아무리 저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드디어라니요. 저는 그 때까지 한 번도 선생님께 이긴 적이 없었습니다. 잘 알고 계실텐데요? 만약 그 전에 제가 선생님을 이긴 적이 있었다면 저희의 이별은 좀 더 빨랐겠죠.
아마 선생님께서는 항상 저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야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계셨던 탓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겁니다. 어쩌면 모든 분야일지도 모르고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기분 나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고작 이 정도의 말로 기분 나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선생님을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객관적 진실을 말하려 노력했을 뿐이니까요.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읽으셨을 테고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자기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 역시 선생님께서 말씀 하셨던 대로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거나 경어체를 쓴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저보다 상위의 존재라고 착각하진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선생님께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배울 점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일종의 경의입니다. 아마 선생님께서 제게 편지를 쓰신다면(안 쓰시겠지만) 절대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으실거라 생각합니다. 이 편지로 인해 쓰게 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선생님께서는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시는 거죠. 선생님께서 저를 다 안다고 생각하시고 실제로 꽤 많은 부분이 들어맞듯이 저도 선생님을 꽤 안답니다. 선생님은 남을 평가하지만 그것을 말로 하지 않으시고, 자신 또한 그런 평가를 듣고 싶지 않아 하시죠. 그런 종류의 것은 행동으로 기능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더더욱 그렇기에, 제가 아니면 누가 감히 선생님을 평가한단 말입니까!
처음 테니스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까지만 해도 저희는 꽤 괜찮았습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죠. 그 무렵에는 선생님께서도 꽤 즐거워하셨습니다. 단순히 그 날의 연습 상대를 구해 테니스를 치는 것과 달리 동아리라는 집단의 순기능을 인정하셨죠. 어느 정도 알게 된 상대와 치는 테니스에서 오는 유대감, 승리했을 때의 우월감, 강자를 만났을 때의 경외감,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로움의 이기적인 만족감. 그런 것들을 부정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도 4000자의 글, 운동,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던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성실했던 나날이었습니다.
그 나날들이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 식으로 몇 년만 더 지낼 수 있었더라면, 하다못해 몇 개월이라도! 우리의 글은 결실을 맺었을테고 더 이상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성은 없었을 겁니다. 부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의 목표 중 하나는 금전입니다. 그것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저도 이런 제가 싫고, 그런 걸 인정하는 당신이 싫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것이 성공할 것이고, 같은 시간을 투자한 아르바이트에 비해 훨씬 막대한 돈을 벌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영등포 호화 호텔과 아파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저 판잣촌의 사람들. 그게 우리였더라도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장 하루 먹고 살기 위해 벽돌을 나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 전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과 다음 하루를 준비해야 한다는 비참함 속에서 글의 존재를 떠올렸을 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이 경험을 글로 써내려 가겠다는 희망을 품었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습니다. 단언하죠. 그런 날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천성과 행동의 근본 원리는 게으름입니다. 당장 하루를 나기 위한 일쯤은 어떻게 처리해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밤마다 지친 몸을 추스리고 등불을 켜 볼펜으로 노트에 생각하는 바를 적는 일은 우리와 거리가 먼 일입니다. 건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몇 십개씩 나르는 벽돌들의 무게로 등이 짓이겨지고 다리 관절이 엇나가도 우리는 운동은 커녕 병원에 갈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지금 생활은 어느정도 풍족함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영위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잡설은 이쯤 하겠습니다. 누군가에게 훈계하는 것은 당신의 역할이지 제 역할이 아니니까요. 저 답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졌던 순간을, 우리가 처음으로 같은 생각을 했던 순간을.
선생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먼저 말씀하시겠죠.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 돈을 버는 이유, 존재하는 이유. 그런 것들의 총합이 이 이야기의 핵심일 것입니다. 또 본인이 하신 이야기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기 시작하실 겁니다. 결국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다. 그것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고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지가 약할 뿐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절대 공감할 수는 없다. 저는 선생님께서 말하시는 ‘그들’ 중 한 명이었지만 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저이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테니스 동아리에서 만난 여성에 빠져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였고 운동에 소홀해졌으며 글에는 손도 안 대는 날이 늘어나셨습니다. 앞서 말한 살아가는 이유와 반박을 몸소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셨죠.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했던 말에 반박하며 생각의 폭을 넓혀 나가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행동으로도 그것을 반박하여 생각의 폭을 줄여 나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 앞서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가 없으니 나쁘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선생님을 비꼬려는 의도가 맞으니 오해하지 마시고 맘껏 기분 나빠 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초연하시면 제 꼴이 말이 아니게 되니까요.
결국 선생님의 약점은 사랑이었던 겁니다. 점점 선생님의 말과 행동은 힘을 잃었고 어느 순간부터 제게 의지하기 시작하셨죠. 선생님은 제 말을 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고 가끔은 감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평소 제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를 반대로 느꼈을 때의 기분이란! 선생님께서는 그 분을 보지 못할 때면 원래대로 돌아오곤 하셨으나 그것도 잠시, 그 분을 만날 때마다 철 없던 시절의 어린아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았죠. 지금 상태가 어떻더라도 한 때 제가 의지하고 존경했던 분이십니다. 저와 선생님은 떼 놓을래야 떼 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 사이에서 주도권을 갖는다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선생님은 제 기분을 다 눈치채신 것 같았고 당시 본인의 입장 또한 전부 알고 계셨죠? 객관적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는 방법이 없었죠. 본인 기준으로 잘못된 일이고, 그것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그대로 행할 수 밖에 없는 기분은 분명 비참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셨던 그 분은 선생님만을 사랑하지 않았더랬죠.
제가 본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한 평생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분이 스스로 그것들을 읊기 시작하셨죠. 그건 옛날 교회 수련회에서 느꼈던 맹목적인 믿음 같았습니다. 선생님이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지금은 먼 옛날로 느껴지는!) 초연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종류의 믿음이었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몇 시간 동안이나 그것들을 읊은 선생님께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아마 예전의 선생님이라면 제가 없는 상황에 편안함을 느끼고, 이젠 그 무리의 중심에서 사교적으로 행동하는 저를 보면 조소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불편해 할 말만 잔뜩 하셨으니까요. 아마 그것들은 평생 타인에게 이해 받을 일 없는 경박함의 탈을 쓴 무엇이겠지요. 선생님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말입니다. 저도 그것을 이해하기는 힘드니까요. 하지만 선생님, 제가 지금까지 쓴 글에는 분명 단순히 제 기분을 풀기 위한 부분이 있습니다. 감히 선생님을 가르치려 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진심만큼은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조금씩 다른 것들이 보여도, 이 글의 본질은 선생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상처 받으셨습니다. 꽤 오랫동안 남을 상처죠. 어쩌면 평생 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 매일 다퉜더라도 생각보다 밸런스가 맞는 편이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어찌어찌 계속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렇습니다. 장담하건데 돌아오신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을 겁니다. 흉터는 당연히 남을 겁니다. 하지만 혼자보다는 빨리, 확실하게 아물 겁니다. 그러니까 돌아오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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