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을 다시 듣는다는 것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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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예술회관 소식지 <아트인천> 가을호.
보통은 4쪽인데 이번에 특별히 6쪽 구성. 
주옥 같았던 선생님 말씀을 버릴 수 없어서…
그분의 말씀을 잘 정리하려고 노력한 탓에 내 목소리는 거의, 아예 없다.(잘… 잘한 거겠지?)

 

시인의 마을, 촛불, 사랑하는 이에게…… 정태춘을 다시 듣는다는 것

 

정태춘은 1978년, 문학의 서정성과 한국적인 토속성이 짙은 노래 ‘시인의 마을’로 데뷔해 ‘MBC 10대 가수상 신인상’,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촛불’)’ 등을 받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청계피복노조 후원, 전교조 합법화 지지, 가요 사전심의 철폐운동에 앞장서는 등 시대와 호흡하며 자기만의 정신이 깃든 곡들을 영원한 동반자 박은옥과 함께 불러왔다.

지난 5월에는 그들의 삶과 노래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개봉해 팬들의 다정한 사랑을 받았다. 타협하지 않고 고유한 예술성을 드러낸 작가이자 길 위의 뮤지션, 국민과 시대를 존중했던 사회운동가로서의 정태춘을 지난여름, ‘문화예술기획 봄’ 사무실에서 만났다.

 

“여전히 가사에 매달리고 있어요.”

 

Q 선생님은 싱어송라이터이자 민중가요 가수, 사회운동가, 시인으로 불렸는데요, 어떤 표현이 선생님 자신과 가장 가깝게 느껴지세요?

정태춘 : 가수죠. 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가수. 민중가수는 특정한 시기의 문화현상, 어떤 흐름에서 나온 호칭이라고 생각해요. 제한적이죠. 민중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쓰지도 않고, 오래전에, 그러니까 과거 사회구조가 단순했을 때, 폭력적인 지배와 피지배가 있고, 노골적인 착취와 피착취가 강했을 때, 그때나 어울렸을까. 지금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데에는 부족한 용어라고 할 수 있어요.

 

Q 선생님은 음악의 리듬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작사도 하시는데요, 언어를 다루는 사람은 말, 어휘, 표현에 예민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선생님이 붙잡고 있는 단어, 천착하고 있는 단어가 있을까요?

정태춘 : 단어를 생각하진 않고……. 내게는 텍스트가 음악적인 부분보다 더 중요하죠. 창작의 동기가 음악적인 쪽에서 나오기보다 텍스트로부터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내 속에서 툭 튀어나온 말들, 그 말을 다루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매달리죠. 매달리는데, 사실 듣는 분들은 그 정도까지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어떤 단어로 어떤 뉘앙스를 만들까, 조사나 어미 변화를 통해 어떤 분위기를 이끌어낼까, 그런 것들을 나는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요. 물론 거기에는 결함이랄까 부족함도 있죠. 문제가 있지만 끝까지 들여다보고, 수정하고, 다듬어나가죠.

 

Q 요즘도 노랫말을 쓰세요?

정태춘 : 여전히 가사를 붙들고 있어요.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스무 곡 정도 썼어요. 처음 것부터 계속 가사를 보고 있어요. 음악 없이 텍스트로 먼저 보고, 멜로디 넣어서 불러보면서 음악적으로 어떻게 결합됐는지 점검하죠.

2005, 6년경에 노래를 접고 이제 창작은 끝났다 그러면서 다른 걸 했어요. 사진을 좀 찍었고, 가죽공예를 했고(옆에 있던 검은색 가방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붓을 만지면서 한문, 한시 공부를 했어요. 나는 노래 안 한다, 노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랬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박은옥 씨가 당신이 노래 그만뒀다고 해도 나를 위해 앨범 하나쯤 만들어줄 수 있지 않느냐고 해요.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어요. 노래는 내 속에서 나오는 거니 당연히 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싫다고 했죠. 그러다가 2012년 즈음 문득 , 만들어야겠다싶더라고요. 딱 두 달 작업했어요. 그게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예요.

절대 내 얘기 안 하겠다, 내 마음을 들키지 않겠다. 박은옥을 위한 앨범이다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죠. 내 얘기가 다 나왔고, 녹음하는데 박은옥 씨가 이건 나한테 안 맞고, 당신이 부르는 게 좋겠고 하면서 모양이 이상해졌어요. 결국 노래를 많이 부르게 됐죠. 앨범 내고 노래할 때도 박은옥 정태춘으로 홍보하려고 했는데 박은옥 씨가 동의를 안 하더라고요. 앨범도, 콘서트도 곤혹스럽게 된 거죠.(웃음)

 

“노래……

마음이 부르지, 목이 부르나”

 

정태춘 : 기왕에 가사 얘기가 나왔으니까……. 노래를 만들면 가족들, 박은옥 씨하고 딸한테 들려줍니다. 다는 아니지만 곡에 따라 여러 얘기가 나오죠. 두 사람이 대중성의 입장이나 또 다른 시각으로 신랄한 비판을 하죠. 젠더적인 관점이나 세대, 꼰대나 한남의 특성 같은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요. 혼자 보고 만족할 순 없으니까요. 다시 작업을 시작하니 욕심도 생기고, 좀 더 잘해보자 싶어요.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있다, 정말 좋은 노래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박은옥 씨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해요. 그런 말이 발목 잡으면 어떡하냐고요. 그 정도의 자신감이 없다면 해선 안 돼요. 책임감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내 노래를 기다려주지 않아요. 대중은 정태춘을 기다리지 않지만 내가 노래를 하는 이유는 내가 창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뭔가 만들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게 나에게는 노래예요. 노래 만드는 일이 가장 익숙하고, 사진이나 가죽보다 잘할 수 있고, 성취감도 높은 것 같아요.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노래 만드는 거예요.

네 시 반에 일어나면 모니터를 켜고 가사를 보고, 선을 꽂지 않은 일렉 기타로 반주를 맞춰요.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일어나서 노래 다듬고, 낮에는 볼일 보러 나가기도 하고 책도 보고요. 근래에는 주로 노래만 보듬고 있어요. 딜레마를 겪기도 하지만 계속 가고 있어요.

 

Q 노래를 다시 쓰게 한 힘은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세요?

정태춘 : 말했던 것처럼 노래에 관해선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러곤 포토샵 작업만 열심히 했죠. 사진에 들어갈 말을 만들고 쓰고, 아무튼 그것만 하고 있었는데, 3월에 손녀를 도서관 문화 프로그램에 참석시켜놓고 우연히 자료실에 들어갔어요. 대중음악 코너를 둘러보는데 밥 딜런 책이 있는 거예요. 제목을 기억했다가 집에 와서 주문하는데 가격이 4만 몇천 원이나 해요. 도착한 책을 보니 육백 페이지가 넘고 사진은 별로 없이 온통 텍스트더라고요. ‘완전히 잘못시켰다, 이걸 나보고 보라고? 나 음악 끊었는데?’ 샀으니 어떡해, 들여다봤죠. 평전이었는데 밥 딜런의 전 생애를 다룬 게 아니고, 청년 시절이라고 해야 하나? 그 시기만 언급했는데 그 정도 분량이더라고요. 읽어보니 탁월해요. 최고의 평전이에요.

저자의 음악적 식견과 안목, 글솜씨가 대단하더라고요. 세상에……. 무척 감동을 하고 다시 3만 얼마짜리 가사집을 샀어요. 한영 대조라 이건 또 천 페이지가 넘어요. 그걸 보면서 유튜브에서 음악 찾아 듣고 그랬죠. 밥 딜런 관련한 다른 책, 소설책 같은 것도 사서 읽었어요.

어느 날은 집에 있던 비틀즈 가사집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걸 또 봤어요. 밥 딜런과는 달랐죠. 그러곤 또 레오날드 코헨 평전을 읽기 시작했죠. 그즈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한국 대중음악에서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면서 읽던 책을 다 치우고 노래 만들기에 들어갔어요. 좋은 노래 100곡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런 와중입니다.

 

정태춘은 1954년 경기도 평택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5남 3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미군 부대에 다니던 큰매형이 기타를 가져왔는데 그는 틈만 나면 기타를 붙잡고 있었다. 가르쳐주는 이 없어도 한 번 들은 곡은 모두 기타로 연주했다고 한다. 평택중고등학교 현악부에서는 바이올린을 하는 등 학창 시절부터 음악과 가까이한 시간이 많았다. 하모니카 불고, 얼후라는 중국 악기와 가야금을 콘서트에서 연주한 적 있고, 첼로도 수준급은 아니지만 켤 줄 알고,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불기도 했다. 악기를 품에 안거나 입에 대면서 기구를 통해 육체의 힘을 뿜어낼 때의 희열이 있다. 재주가 넘치는 듯한데 정작 본인은 악기에 소질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Q 그동안 노래 안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고, 지금은 또 어떤 메시지를 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정태춘 : 세계가 어마어마하게 변했는데, 변화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요. 국가가 산업의 하위체제에 있는 것 같고, 인간이 시장 시스템에 빨려 들어가거나 도태되는 상황들을 보게 돼요. 그런 상황에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담론이 있었는데 별로 귀 기울이지 못했죠. 준비나 대비는커녕 그 상황에 적응하기도 바빴으니까요. 나의 고통 해소와 생존이 급박하니 공공적인 차원에서 미래를 고민할 겨를이 없는 거예요. 기후변화, 산업의 비인류성 같은 것이 소수의 외침 정도로, 한가로운 이야기 정도로 취급됐던 것 같아요. 그런 가운데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 가장 고통받는 이야기를 찾아 그걸 그리고 있어요.

 

Q 멜로디에 덧붙여진 가사 외에 읊조리듯 말하는 내레이션이 들어가는 노래가 많은데 선생님에게 내레이션은 어떤 의미인가요? 음에 붙여진 가사와는 어떤 다름이 있을까요?

정태춘 : 더러더러 쓰죠. ‘92년 장마, 종로에서에도 내레이션이 있고, ‘5.18’이라는 노래를 할 때는 광주에서 하려고 특별히 준비한 것도 있었어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노래를 그만둬야겠고 생각하면서 완전히 접었는데, 2019년에 40주년 콘서트 할 때 기획팀에서 내레이션을 쓰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이제 할 말이 없다, 노래 안 만들 때니까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안 했죠.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때는 박은옥 씨가 글을 썼고, 그걸 직접 낭독하면서 공연을 마무리했어요.

 

“시대에 대한 분노를 생각했죠.

내 속에 그것이 있었으니까요.”

 

Q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신문 기사를 삽입한 다큐멘터리적 편집과 맥락 때문인지 영화 속에서 만난 노래는 집에서 들은 것과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마음이 몹시 요동쳤다고 할까요. 선생님이 그 곡을 쓰게 된 계기가 불행한 현실에 가슴 아팠고, 사고를 당한 아이들과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혹시 그런 진심을 몰라주고 왜 이런 걸 노래로 만드냐는 항의도 들으신 적이 있으세요?

정태춘 : 그렇진 않아요, 나한테 부정적인 피드백이 온 건 별로 없어요.

안타까운 현실을 관념적으로 쓰거나 적당히 얼버무려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최대한 리얼리티를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일부러 노래 앞부분에 신문 기사를 내레이션으로 넣었고, 가사에는 내가 보지 못한 방안의 풍경, 손톱에서 피가 나는 것까지 상상해서 썼어요. 사람들이 연민이나 슬픔보다 분노를 느끼길 바랐어요. 분노, 시대에 대한 분노를 생각했죠. 내 속에 그것이 있었으니까요. , 그때는 그랬는데 이제는 그렇게 쓸 것 같진 않아요. 분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이요.

그 노래가 굉장히 긴데 영화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놀랐죠. ‘과하지 않아? 다 넣는다고? 영상도 없는데? 그냥 노래하는 장면뿐인데?’ 감독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영화에서 힘을 준 부분이죠. 하나도 자르지 않겠어. 반드시 보고 넘어가야만 해!

 

Q 영화 초반에 나온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음반사에 가려고 서울에 도착해서 처음 드셨다는 메밀국수 에피소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메뉴판을 보다가 국수가 들어간 음식을 주문했는데 낯선 모양의 그릇이 나왔고, 먹는 방법을 몰라 네모난 메밀 판 위에 육수를 부어버렸다고 하셨죠. 이후에 메밀국수를 드셨나요?

정태춘 : 지금은 잘 먹죠.(웃음)

촬영 때도 말했지만 주어진 채로 나타난 서울이라는 환경에 호감이 가지 않았어요. 적응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죠. , 나 좀 싫은데. 나 이 사람들 따라가고 싶지 않은데 그랬어요. 촌스러웠죠. 어쩌면 그게 인생 전반을 지배하고 관통했던, 내게 주어진 세계에 관한 나의 자세예요. 적응과 순응이 아닌 뒤로 빠져 있는 모습이요.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니 함께 싸우길 바라고, 그런 사람들과 싸우는 태도는 아직 여전하지만 변화에 적응하자고 마음먹는 사람은 아니에요.

 

첫 앨범 <시인의 마을>(1978)이 크게 히트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앨범은 사랑받지 못했다. 1990대 초반 한국 대중들의 요구와 관심이 달라진 탓도 있었지만 어쨌든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정태춘은 그 앨범에 대한 자신의 열심과 고집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으로 대중성과 시장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나는 어떻게 노래해야 할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곤경과 사유의 시간이 없었다면 <떠나가는 배>(1984), <북한강에서>(1985) 같은 앨범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정태춘은 다시 상업적인 성공을 거머쥐었고 작가주의적 언더그라운드 포크 뮤지션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사람들>(2019) 발표 후 코로나로 말미암아 한동안 무대에 서지 못하다가 2022년 8월 20일과 21일,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영상과 함께 하는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Q 2019년에 데뷔 40주년을 맞았는데요, 이후 달라진 점이 있으세요? 특정 숫자가 주는 환기랄까 나이 먹는 것과는 다른 가수로서의 역사를 새삼 깨닫게 되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태춘 : 활동에서의 일단락, 삶에서의 일단락이었죠. ‘내놓는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게 있다면 다 내놓겠다, 다 비우겠다, 빠져나가겠다 그랬어요. 40주년 프로젝트 하기 전까지는.

40주년 기념으로 콘서트, 전시, 책 발간 등을 진행하면서 그런 생각이 희박해진 것도 있어요. 열린 음악회, 아침마당, 뉴스 같은 데 나가고 인터뷰도 어마어마하게 했거든요. 내 일에 매달린 사람이 많으니 이렇게라도 돕자고 했던 건데 새삼 시장에 들어가게 된 셈이고, 아직 거기에 머물러있는 것 같아요. 많이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또 새 노래를 만들고 있으니 앨범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시장이 아니고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도 저도 잘 안 돼도 그냥 간다, 내 노래를 한다…….

 

Q ‘에 따라 다가오는 노래가 있고 멀어지는 노래가 있을 텐데요, 선생님에게 요즘 다가오는 노래는 어떤 게 있을까요?

정태춘 : 요즘 만들고 있는 노래죠. 노래의 작은 공간에 빠져 있어요.

앨범으로 말하면 2012년에 만든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작사와 작곡 등 음악 작업을 오롯이 혼자 했거든요. 다른 가수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마지막 앨범에 애정이 많이 가요.

한국적 서정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표현하고픈 욕심이 있어요. 많이 고민하고 많이 상상하죠. 더 넓게 관심 갖고, 더 넓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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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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