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수상작_몽상夢想(정진호)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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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夢想)

 

정진호

 

 

*

한적한 정오 편의점에는 음료가 진열된 쇼케이스 냉장고의 진동 소리만 낮게 울리고 있다. 편의점에는 음식 냄새라기엔 약간 쾌쾌하고, 단지 포장지 냄새라기엔 약간 새콤한 냄새가 났다. 소리도 냄새도 모두 어딘가 창백한 느낌을 주었다. 일본산 콘돔부터 골뱅이 통조림까지 물건 가득한 매대 너머 구석 자리에 통신사 이름이 적힌 조끼를 입은 한 사내가 앉아 있다.

일회용 마스크를 쓴 사내는 앞에 놓인 복권 용지가 무슨 시험지라도 되는 마냥 뚫어지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종이 안에서 답이 있을 리 만무했으나 마치 잘만 살펴보면 무언가 비밀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어떤 막연한 희망이 섞인 눈동자로 그는 용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복권 용지만 빤히 쳐다보는 사내는 언뜻언뜻 입술을 깨물고, 사인펜을 쥔 손을 떠는가 싶더니, 어느새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망설인 채 들고 있던 손을 과감히 움직이는 순간, 숨을 뱉어내면서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왼쪽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나무위키를 보자. 나무위키.

오늘 사내는 낯선 체험을 했다. 어젯밤 그는 유튜브 영상을 몇 개 보면서 맥주 두어 캔을 마셨고 평소와 같이 새벽 1시가 다 돼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에 나폴레옹이 나왔다. 맑은 하늘에 저 너머에 눈이 한가득 쌓인 산맥이 있었는데, 그 광활하고 높다란 경치 앞에 백마를 탄 나폴레옹이 가로막고 우뚝 서 있었다. 마치 그림처럼.

사내는 하얀 말 위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있는 귀여운 프랑스인을 가만히 바라봤다. 올려다보고 있는 처지였으니 아마 그는 일개 병사 나부랭이였을 것이다. 말에 올라탄 작은 프랑스 꼬마는 어딘가 정겨운 얼굴이었다. 사내는 볼이 통통하고 발그레한 것이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내 귀여운 꼬마 장군은 도열(堵列)되어 있는 병사들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과 우리 군 사이를 끊어놨고 우리 앞에는 저 높은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프랑스 말이었다. 그는 프랑스 말을 전혀 모르는 한국인이었지만, 분명 저 꼬마의 말은 프랑스어였고, 사내는 그 말이 모두 이해됐다.

떨리는가?’

백마 위 아기는 말했다. 튼실한 백마 위에 올라가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사내는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용사여 두려워 말라.’

이내 사내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백마는 짧게 울었고, 모두는 주목했다.

보물은 진창 속에 숨어있다! 쟁취하고자 하는 이는 고통을 두려워 말라!’

아기는 백마의 앞발을 차올리고, 저 드높은 곳을 향해 손을 들며 외쳤다.

……!’

하지만 사내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분명 들렸는데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감격스러웠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득해지는 아기의 외침이 그의 삶의 섦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무시당하고, 고개 숙이고, 억울하고, 그러면서도 꾹 참고 살았던 것들을 모두 위로해줄 만큼 감격스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득해지는 소리와 함께 그림 같은 장면을 흐릿해지고, 사내는 잠에서 깼다. 눈을 떴을 땐 아직 이른 새벽이었고, 머리가 이상하리만치 개운했다. 그는 누운 채로 잠시 멍하니 푸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꿈의 장면은 지워지지 않았다.

A/S센터 안에선 여기저기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그러셨습니까 고객님……, 하는 상담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출근한 사내는 그런 소음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무료히 유튜브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꾼 꿈만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검색창에 무엇을 검색해보려다 멈칫하고는, 바로 옆에서 마스크로 입만 대충 가린 채 핸드폰 게임을 하던 후배를 돌아봤다.

야 민재야, 너 나폴레옹 아냐?”

그는 사내를 보지 않은 채로 어, , 하고 대충 대답했다.

사내는 꿈을 꿨는데 말이야…… 하고 말하려다 괜히 복이 날아갈까 싶어 그 사람 좋은 사람이냐?”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 한참 어린 후배는 핸드폰 화면 옆으로 고개를 빼선 사내를 쳐다봤다. 이 양반이 뭐라는 거야. 그는 꼭 그런 얼굴로 사내를 바라봤다.

왕 아니에요?”

그니까 그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를테면 신호라던가? 하고 사내는 머릿속에 이런저런 질문이 가득했지만 금세 마스크를 코끝까지 올려 쓴 후배를 보고는 결국 관두었다. 얼마 안 가 출장 접수가 들어왔고, 사내는 센터에서 출장을 나갔다.

사내가 찾아간 곳은 젊은 주부의 집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서 따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마치 사내로부터 무언가 지키고자 하는 것처럼. 여자는 TV의 문제는 전혀 관심 없는지 몇 걸음 물러나 멀찌감치 서 있었다. 멀리서 아이를 꼭 안고 있는 꼴이 마치 사내를 해로운 무엇으로 취급하는 것만 같았다. 강도나 도둑이라기보단 바이러스나 바퀴벌레 같은 것. 위험하고 무서운 게 아니라 불쾌하고 징그러운 것처럼 고객은 직원을 지켜봤다.

읏차.”

사내는 온갖 선들이 뒤섞인 TV 뒤에서 몸을 빼내고 마스크를 고쳐 썼다. 먼지 가득한 곳에서 빠져나와 작게 숨을 토해내며 리모컨을 들고 일어났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 넘기며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서비스 연결 중입니다…… 그는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내 방송화면이 켜지고, 화면 오른쪽 끄트머리에 “000 olleh TV” 글자가 떠올랐다. 여자는 목을 쭉 빼 화면이 켜지는 걸 보고는 슬며시 한 걸음 다가왔다. 사내는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 보며 여자에게 말했다.

선이 잘못 연결되어 있었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여자는 그의 말을 딱 잘라 말했다.

, , 남편분께서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그이가 그럴 리가 없죠. 저이는 리모컨만 만지는데.”

사내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뻔뻔한 얼굴은 TV의 문제를 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집에 벌레가 있으니 잡아달라 사람을 불러놓고 되레 벌레 취급을 하지 않나. 잡아주니 애당초 벌레가 들어온 게 잡아준 사람 탓이라니. 그는 일순간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습관적으로 사내는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런 뒤 무표정으로 그는 TV 화면을 돌렸다. 그는 조용히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해결됐고요.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또 무슨 문제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문득 TV 채널은 계속 바뀌었고, 문득 한 예능 방송이 나왔다. 학벌 좋은 연예인들이 나와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듣는 방송이었는데, 사내는 순간 TV 채널을 멈춰 세웠다. 사내는 화면 속 교수 뒤에 펼쳐진 익숙한 그림을 발견했다. 눈이 쌓인 산맥과 말에 올라탄 장군. 그 익숙한 그림이 단박에 사내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음량 버튼을 눌러 소리를 키웠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여기를 딱 막은 거예요!”

강의를 듣던 연예인들은 어머, 하고 놀랐다. “그런데 알프스 산맥을 돌아가면 이미 늦는 상황인 거죠그렇다면 과연 나폴레옹은 어떻게 했을까요?” 교수의 뻔한 물음에 연예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내는 가만히 TV 화면을 쳐다봤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교수가 말하는 동시에 사내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알프스를 건넌다.”

그건 그가 꿈에서 놓쳤던 바로 그 말이었다.

그 말을 하고 바로 이 산맥을 건넌 거예요.”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

사내는 화면 속 교수가 산맥을 가리키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지워지지 않는 저 장면과 이 상황. 사내는 확신했다. 나폴레옹은 좋은 거다. 나폴레옹 꿈은 길몽이다.

사내는 스마트폰을 켜 나무위키에 적힌 나폴레옹의 이력을 숫자 중심으로 살폈다.

출생 1769815. 사망 182155. 신체 168cm, O(Rh-). 오 마이너스. 재위 11804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들그 절대정신을나는 보았다게오르그 헤겔프랑스 공화국을 쿠데타로 집어삼키고 황제에 올라나폴레옹은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로서그는 편의점 구석에서 나폴레옹의 설명을 멍하니 읽었다.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파륜(拿破崙)이라고 표기한다.”를 읽을 즈음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깨닫고 스크롤을 다시 위로 올렸다. “출생, 사망, 재위, 대관식, 장례식그는 혀를 끌끌 차며 이번엔 그 안에 어떤 답이 있을지 모른다는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화면 위로 전화 알림이 떠올랐다. 여자친구였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마다 오는 그녀의 전화는 뭐 먹었느냐 오전에 너무 힘들었다 하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다 사랑해, 하고 끊는 게 전부인 시답지 않은 통화가 분명했다. 평소라면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사내는 알림을 화면 위로 올려버렸다. 이내 울리던 진동은 맥없이 끊겼다.

출생, 재위, 대관식. 셋 중 하나로 하자. 그러면

조급하게 고민하던 중 다시 전화가 왔다. 역시 여자친구였다.

울컥 짜증이 난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응 지연아, 오빠가 지금 출장 나와서,”

오빠 나 임신했어.” 그녀는 그의 말을 싹둑 자르며 말했다.

?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펜을 쥔 사내의 머리는 순간 새하얘졌다. 보물을 찾은 건지 진창에 빠진 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아니면 아쉬워야 하는지 기뻐야 하는지. 그는 헷갈렸다. 아주 잠깐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 꿈일까? 아니었다. 순간 멈춰있던 머릿속의 생각들이 뒤섞이더니 순식간에 탁해지고 복잡해졌다. 혹시 내가 꾼 것이 나폴레옹 꿈이 아니라 알프스 산맥 꿈이었던 아닐까. 그 토실토실한 아기가 나를 산맥에 끌고 가는 꿈이었나. 그런데 왜 나는 감격스러웠지. 억울했던 건가. 어쩐지 종일 다들 나를 무시했던 거 같기도 하고. 오늘 나는 진창이었을까. 앞으로도 진창일까. 내가 보물을 얻은 건가. 그럼 복권은? 애초에 그게 길몽이 아니었을까? 그럼 나는?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지?

여보세요. 오빠 듣고 있어?”

차오르는 감정에 사내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참을 망연히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편의점엔 창백한 소리와 냄새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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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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