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수상작_탭트라(나예빈)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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탭트라

 

나예빈

 

 

탭트라, 사람들은 왜 우리를 쳐다보는 것일까? 시선이 내 몸을 훑을 때마다 어딘가 베인 것처럼 따가워. 혹시라도 피가 흐르는 건 아니겠지. 가을이라는 것이 연극 무대처럼 꾸며진 것 같아. 아주 어릴 적에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맡았던 나무 역할이 기억나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단풍놀이를 간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춥거든. 얇은 옷을 여며보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구나. 하늘로 손을 뻗어서 잡아당기면 색종이가 뜯겨 나오려나.

너의 피눈물이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니? 어제 아빠가 엄마를 때린 탓인가 봐. 봐봐. 내 머리 위로 끈적한 피가 흘러내려. 나는 귀로 말을 듣지. 하지만 너는 그 큰 입으로 말을 받아들이잖아. 그걸 먹고 성장하고. 차라리 먹는 것보다 듣는 게 나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말로 자란 너는 겉모습이 끔찍하지만 말로 다친 나는 티가 나지 않아 아무도 모르거든. 이 골목만 꺾으면 곧 집이 나와. ? 도망치자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달리 갈 데가 어디 있겠어.

선생님은 항상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셔. 소망이나 희망 같은 것들이 없어서 내가 우울한 거래. 우울하다는 건 무엇일까? 매일 도망치는 사람을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걸지도. 나는 선생님처럼 생각하지는 않아. 오히려 이루기 어려운 것들을 품으면 그것들끼리 뭉쳐서 어두워지는 거야. 탭트라, 너의 몸처럼. 밝은색 무늬를 가졌지만 뒤죽박죽 섞여 기괴하잖아. 이제 집에 다 왔어. 들어가야만 해. 늦게 들어갔다간 혼이 날 거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니? 그때 너는 아주 작고 귀여웠어. 온전한 생명력을 가지지 못해 소리 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처음에는 불가사리인 줄 알았어. 별 모양으로 생겨서 붉은색을 띠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나는 섣불리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뒤에 숨어서 지켜만 봤잖아. 너무 무서웠거든. 누굴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정체 모를 붉은 것이 방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봐. 사실 아빠가 너를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 항상 날 감시하고 싶어 하니까. 그러다 알아차린 거지. 숲속에서 만나 이름 붙여 주었던 단풍잎이라는 것을. 너를 숲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 역시 나는 도망치는 중이었어.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했는데 엄마가 계속 뛰라고 소리치는 거야. 결국에는 신발이 벗겨지고 나는 낭떠러지로 구르고 말았지. 그러고 나서야 쉴 수 있었어. 다행히 그 아래에는 단풍잎이 가득 쌓여 있어서 다치지는 않았어. 겨우 정신을 차린 뒤에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너를 보고 외쳤지. 탭트라! 네 이름은 이제 탭트라야. 탭트라. 우리는 그때부터 줄곤 함께였어.

엄마는 단풍잎에 이름을 붙이는 나를 이상하게 보았어.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 무언가에 이름을 선물한 게 네가 처음은 아니었단다. 나는 만나는 모두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내 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어.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나에게 있어 단풍은 다른 것보다 더 특별했으니까. 너를 만난 그날 이후로 단풍잎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어. 그래, 맞아. 내 방 침대에 있던 액자 속 그림.

나는 여러 가지를 더 그려본 뒤에 그걸 학교에서 미술을 알려주시는 앨리스 선생님께 드릴 생각이었어. 곧 청소년 미술 대회가 열린다고 했거든. 내가 그림을 벽에 걸 수 있도록 액자를 선물해주신 분도 앨리스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큰 기대를 했어. 그림의 진가를 알려주시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지. 일등을 하면 미술 캠프에 갈 수 있었거든. 무려 한 달씩이나! 엄마는 함께 갈 수 없지만 너 정도는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이 부풀어났어. 비밀 친구를 잘 잡은 옷 사이에 넣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럴 때는 붉은 단풍잎이라는 게 큰 도움이 되더라고.

작품이 완성되어 갈 때쯤이었던 것 같아. 아빠가 내 방으로 들어왔어. 아빠와 눈을 마주한 나는 시선을 돌리며 종이 끝자락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어. 그리고 그걸 내렸지. 무릎 아래로. 혹시라도 내 그림이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되었거든. 조심히 한다고 노력한 건데 예리한 눈초리를 속일 수는 없었지. 내 무릎에 앉아있던 네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어. 온몸을 흔들어댔었잖아. 어떻게든 도망가라거나 그림을 지키라는 의미였겠지. 나는 그럴 수 없었어. 그냥 힘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림은 발 근처로 떨어졌지. 다음 날 내가 앨리스 선생님께 보인 것은 내 몸에 알록달록하게 새겨진 아빠의 무늬가 전부였어. 새로 만들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거든. 어쩌면 나 자신이 미술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잘 못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단다.

제가 원래 드리려고 만든 작품은 이제 드릴 수 없게 되었어요. 그 대신 다른 단풍 그림을 보여드릴게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거요. 제 방에 오시면 보실 수 있어요.

나와 마주한 채 두 손으로 입을 막던 선생님.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어. 답답해 얼른 확답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선생님 쪽으로 손을 뻗자 뒷걸음칠 치시더라. 자각하지 못했던 일인지 말을 더듬으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어.

아니. 아니야. 이건 선생님이 갑자기 놀라서 그만.

그대로 뒤를 돌아 미술실을 나왔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오히려 양손으로 귀를 막고 복도 끝을 향해 뛰었잖아. 도움을 구하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게 낫겠다. 그날의 나에게 주어진 결말은 미술 캠프가 아니라 혼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이었어. 작았던 네 크기가 그날 조금 더 커졌던 것 같아.

 

그 후로 며칠 학교에 가지 못했던 거 기억나니? 엄마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했잖아. 그날도 아빠는 화가 난 채로 외출을 끝 맞췄어. 사실 아빠의 외출은 항상 그런 식이야. 집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이번엔 일자리를 구해 우리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야겠다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돌아올 때는 얼굴에 그늘이 져 있어. 동네 사람들 평가는 우리와 달라.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 그렇게들 부르거든. 어떤 말을 하더라도 화내는 법이 없고 남을 잘 돕는데. 일자리를 줄 수 있냐고 찾아왔을 때 허드렛일만 시키고 돈을 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서 이용하려고 드는 이들도 있었어. 아빠는 그 사람들에게 낼 화들을 마치 풍선을 만드는 것처럼 마음속 안에 채워 넣어. 한계가 있을 거 아니야. 점점 부풀어 오른 마음속 풍선은 집에 갈 때 즈음이면 터지고 마는 거야. 그 파편에 엄마와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다칠 수밖에 없어. 하는 거라고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는 것뿐.

아무리 오래 겪어도 아빠의 화가 익숙해지지 않는 엄마는 그날도 상처를 많이 받았어. 사람이 유리가 아니라 참 다행이야. 유리는 낮은 높이에서 살짝 떨어트리기만 해도 깨지고 말잖아. 몇 년이 넘도록, 아니 어쩌면 내가 셀 수 없는 시간을 겪고 나서도 엄마는 아직 내 곁에 있었어. 가끔 잠을 자다 일어나면 엄마가 내 곁에서 사라질 것 같아 놀라서 벌떡 일어나 흔들어 깨워야만 했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눕히고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다시 자던 나. 그사이에 누워있던 탭트라. 나는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변화를 기다리지 않았어. 변화는 편지와도 같았거든. 다른 사람들은 하루에도 여러 종류의 편지를 받아 우체통이 가득 차는데 우리 집만은 그렇지 않잖아. 누군가,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한참을 방에서 누워있던 엄마는 약을 몇 개나 먹고 난 뒤에야 일어났어. 작은 힘이 생기자마자 엉망인 집을 정리했지. 아빠가 먹고 아무렇게나 버려둔 패스트푸드 흔적들과 술병들. 아직 걸음걸이가 온전하지 않아서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주운 뒤에는 휘청거리면서 일어났어. 나는 그런 엄마 주위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도왔어. 조금씩 방에 쌓인 쓰레기를 내다 버려서일까. 그림자가 지어 어두운 방 안이 밝아지는 것 같더라고. 그 순간만큼 우리는 행복했어. 별거 아닌 청소를 하면서도 웃어댔으니까. 너도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식탁 다리에 몸을 숨겨 나를 따라다닌 거 알고 있어. 정말 모두가 즐거웠지.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더더욱 좋았을 거야.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아빠. 또 동네에 누군가를 도와주고 온 건지 옷 군데군데가 엉망이었어. 걸을 때마다 먼지가 일어서 우리들이 가꿔놓은 집 안이 어지럽혀지는 거 있지. 엄마는 나를 뒤로 숨기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아빠는 그 결정을 원치 않았어. 그 행동이 자신을 무시하는 거라며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걸 다 던져댔어. 그때 손에 꽃병이 들렸고 놀란 엄마가 품에 나를 감싼 채로 돌아서더라고. 다행. 그걸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엄마의 등을 맞고 튕겨 나간 꽃병은 깨졌지만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또다시 안 보이는 곳에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났겠지. 눈 앞에 펼쳐진 깨진 유리 조각. 나는 이를 악물고 방으로 달려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들려 밖을 내려다보니 경찰 아저씨가 온 거야. 나는 조금 더 몸짓이 커진 것 같은 너와 함께 침대로 올라가 아빠와 아저씨의 대화를 지켜보았어. 경찰 아저씨는 아빠를 잡아가는 대신에 격려하듯이 어깨만 두드렸어. 무언가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처럼. 웃으며 경찰차를 배웅하던 그 얼굴. 차가 집 근처를 떠나자 붉게 달아올랐어. 발걸음이 어찌나 무거운지 아빠가 만든 우리의 세계가 쿵쿵 울렸어. 문을 열고 나가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용기가 생기지 않더라. 그저 흔들림이 멈추기를 바라며 침대 위에 누워 심장 부근에 손을 얹었지. 여전히 내 심장은 뛰고 있다고 안심하며. 고개를 드니 반대로 뒤집힌 단풍 그림이 보였어. 너를 손에 쥐고 이불에 들어갔어. 엄마와 도망치던 그 날을 되새기기 위해. 곧 나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어. 너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창문을 열었어. 그러자 너와 비슷한 아이들이 마구 방으로 들어왔지. 다르다면 색이 어두웠다는 게 전부였어. 어찌나 많이 들어온 것인지 앞으로 걸어가기도 힘들었다니까. 나는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 너를 향해 미소를 지었어. 그게 포근함을 선물해준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거든. 한참 뒤에 방으로 돌아와 벽에 걸린 단풍 그림을 떼고 나니 너의 친구들이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어. 그리고 탭트라, 지금의 네가 태어난 거야. 거대한 몸짓을 가진 우울.

, 드디어 집 앞이다. 아마 오늘도 아빠가 있을 거야. 왠일로 아침에 화를 내지 않고 자기만 했으니. 저녁에 화를 내겠지. 우리는 이 문을 열고 집으로 가야만 해. 그곳이 내 자리고, 세계이니까. 이 집의 모든 것은 오롯이 우리 가족의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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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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