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짧은소설 공모전 당선작) 잠수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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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


지영롱


  모서리부터 천천히 젖어들었다.
  모서리. 정확히 말하자면 모서리가 아니라 꼭짓점.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은 모서리와 꼭짓점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육면체에서 모서리란 길고 반듯한 선이고, 꼭짓점이란 선이 만나는 뾰족한 지점이다. 모서리에 부딪히면 아프지만 꼭짓점에 부딪히면 존나게 아프다. 알겠나? 아이들은 깔깔 넘어갔다. 담임은 모서리와 꼭짓점을 구분할 줄 알아서 모서리로만 아이들을 때렸다. 꼭짓점으로 때리면 자국이 남으니까. 그러나 성인 남성의 매질은 모서리로 때려도 존나게 아팠다.
  담임이 설명하던 정육면체, 딱 그 모양의 방이었기 때문에 꼭짓점 또한 정확히 여덟 개였다. 그중 천장에 있는 한 개의 꼭짓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점이었다. 그런데 점의 원주가 조금씩 늘어나더니,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곧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미 누런 벽지는 색이 변해도 티가 덜 났다. 처음엔 금 간 대야를 구해다 물을 받았는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틈으로 물이 새어나왔다. 물이 스미는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고, 며칠 내로 방이 물에 잠길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분명 마른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등허리가 축축해서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니 뒤통수에서 물이 떨어졌다. 전기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고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더듬더듬 움직였다. 간간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휴대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이었다. 배터리는 십칠 퍼센트 남아 있었다. 다시 휴대폰을 껐다. 어둠에 익숙해지니 방에 있는 것들의 어렴풋한 윤곽이 드러났다. 불을 켜지 않아도 꽤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벽에다 방수 기능이 있는 시계를 하나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물인지 알 수 없었다. 벽을 두드려 보니 텅 빈 나무 소리가 났다. 옆집도 윗집도 아랫집도 모두 똑같이 생긴 방일 텐데. 아니, 이 방 밖에 다른 방이 있긴 했던가. 방들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항상 고요했다. 벽을 타고 흐르던 물은, 천장이 모두 물에 젖자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바닥이 자작하게 물에 잠긴 시점이었다. 처음엔 방 한 중간으로 톡. 물방울이 떨어졌다. 또다시 톡. 손을 오목하게 모아 물방울을 받았다. 톡. 톡. 토독. 토도독. 토도도독. 물이 손에 가득 차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천장은 용케도 무너지지 않았다. 꼭 방에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비는 미성년의 아이에게 낭만적인 일이었다. 우산을 챙겼으면서 모른 척, 한 우산 아래 몸을 붙이던 순간. 한쪽 어깨가 젖는 것도 마냥 뿌듯했다. 기이한 각도로 기울어진 우산이 그 시절의 사랑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 내리는 빗방울을 딛고 하늘로, 더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었다. 아이는 세차게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꼭 박수갈채 같다며 키득거렸다. 그때는 이불 아래 입맞춤이면 거뜬히 살았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바닥을 향해 침전하는 모든 것들은 아이의 분야가 아니었다. 사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랬다.
  물이 더 차오르면 방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마지막 외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방을 나섰다. 바닥과 문 사이에는 약간의 단차가 있어서 아직은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 잠깐 열린 문틈 사이로 물기가 조금 배어 나왔다. 들킬까 싶어 발로 문질러 없앴다. 다행히 금세 말랐다. 서둘러야 했다. 밖에 나와서 보니 옆집도 윗집도 아랫집도 모두 잘 있었다. 방문은 모두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어느 집에 물난리가 나도 문만 꼭 닫으면 티가 안 났다. 한 가지 다른 건 문에 붙은 호수였다. 긴 복도를 걸으며, 어쩌면 다른 방에도 비가 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근처 마트로 가서 물속에서도 끄떡없다는 시계를 샀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수경과 호흡기도 필요했다. 성인용은 비싸서 터닝메카드가 그려진 어린이용으로 샀다. 사이즈는 작았지만 사용하기엔 문제없을 것 같았다. 판매하시는 분이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선물하시는 건가요? 아뇨, 제가 쓸 건데요. 아! 휴가 가시나 봐요. 아뇨, 방이 물에 잠겨서요. ……아!
  한여름의 공기는 생각보다 상쾌했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만 있다면. 물속은 아무래도 밖보다 훨씬 아늑할 텐데.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가를 지나는데 어느 가게의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올해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해보다 긴 장마가 될 것으로 예상되며 강수량은…….
  다시 방문을 열자 울컥울컥 물이 넘어왔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완전한 암흑이었다. 외출하는 동안 말랐던 신발이 다시 젖었다. 시계에 건전지를 채우고 벽에 못을 박아 걸었다. 방이 깜깜해서 가까이 가야만 간신히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흠이었다. 물에 잠기는 마당에 시간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인간은 원래 시간을 따라 사니까. 침이 야광이면 더 좋을 텐데. 그러나 야광도 모아둔 빛이 소진되면 힘을 잃는다.
  물에서는 저항을 줄이는 편이 헤엄치기 수월하다고 배웠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었다. 낡은 운동화가 태평하게 방을 떠다녔다. 창문이 없으니 아무도 방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었다. 눅눅한 티셔츠도, 젖은 청바지도, 속옷도 모두 벗었다. 물건들이 떠다니는 게 달갑지 않아서 그러모아 여닫이 서랍에 넣었다.
  방문은 곧 잠길 거였다. 아, 화장실이라도 미리 다녀올걸. 아쉽지만 별 수 없었다. 첨벙거리며 바닥에 앉았다. 어느새 명치까지 물이 찼다. 머리 위로는 끝없이 물이 떨어졌다. 후두두두둑. 조심스레 뒤로 누워 몸에 힘을 풀었다. 가까스로 물에 뜰 수 있었다. 어릴 때 들은 수영 수업이 이제야 도움이 되었다. 수경과 호흡기는 배 위에 얹었다. 방에 먼지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물이 깨끗하지 않을 게 뻔했다. 빗물이라면 더더욱. 사소한 건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물이 거칠게 떨어졌기 때문에 뉘인 몸이 일렁거렸다. 피곤한 하루였지만, 물 위에 누워 잠에 든다는 건 쉽지 않았다. 삶에 대한 일말의 본능이 남아 있었다.
  문득 이 방에 물이 가득 찬다면 몇 리터 정도 될까 궁금해졌다. 정육면체의 부피를 알기 위해선 모서리의 길이부터 알아야 했다. 한 평짜리 방이니까 모서리의 길이는 대략 일쩜팔 미터. 정육면체의 부피는 가로 곱하기 세로 곱하기 높이. 일쩜팔 곱하기 일쩜팔 곱하기 일쩜팔……. 그런데 이 방이 정확히 정육면체라는 건 확실한가? 어쩌다가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 일쩜팔을 머릿속으로 세 번 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할걸. 숫자는 중요하니까. 방의 부피를 구할 때도, 호수로 방을 구분할 때도 필요했다. 수학은 좋았는데 담임이 싫었다. 담임만 아니었다면 물의 양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방에 다시 들어온 순간부터 이런저런 후회만 쏟아졌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정말 필요한 건 지느러미와 아가미뿐. 그게 다였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둥실둥실 몸이 떠올랐다. 천장이 그만큼 가까워졌다. 홍수가 나서 집이 물에 잠겼다는 보도를 신기하게 관람하던 때가 있었다. 비는 높은 곳에서 시작되는데도 낮은 곳부터 적셨다. 속절없이 가라앉는 터전에서, 무력한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도 젖어 있었는데 땀인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몰랐다. 우리는 아이고 저걸 어째 하며 티비 앞에 앉아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쯤이야 방문을 닫듯, 티비 전원을 꺼버리면 그만이었다. 보이지 않으면 내 것은 아닌 뉴스들. 누군가의 목숨이 섞인 가십들. 그러나 늘 부유하는 사실들. 물은 끝을 모르고 밀려들어 기어이 숨통을 막는다.
  턱 끝까지 물이 차올랐다. 비가 온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다. 비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경을 쓰고 호흡기를 물었다. 몸이 가라앉았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고, 물속은 더욱 깜깜했다. 잠겨 있던 먼지들만 하얗게 빛났다. 손을 뻗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더 아래로 내려가자 호흡기로 물이 들어왔다. 숨을 참았다. 맨몸으로 헤엄치는 건 처음이었다. 산소 없이도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아가기 위해 쉬지 않고 다리를 저었다. 점점 몸이 노곤해졌다. 다리가 교차되는 속도도 느려졌다. 방이 이렇게 넓었던가. 암흑 속에서도 먼지들은 꿋꿋하게 반짝였다. 이대로 가라앉으면 바닥에 닿을 수 있을 테지.

  이 세계가 범람하길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그치지 않는 빗속에서 희한한 꿈을 꾸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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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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