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싫다는 새파란 거짓말-6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 투어 버스에서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으니
나만 나를 붙잡으면 되니
그곳이 한국이든 외국이든 뭔 상관이랴

일하라는 사람도
일하자는 사람도
일하라고 닦달하는 사람도 없이

언제까지 뭘 하라거나
해야 한다거나
할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없이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겨울엔 안절부절 못하겠고

기약 없이 5회씩, 10회씩 돌아가는 강의의 반복
꾸역꾸역 붙잡고 오던 일이 끊기면
한겨울에 몰아닥치는 어둠

살아갈 날들 중에서 가장 젊은 현재의 나이를
생애 가장 늙은, 살아온 날들 중에서 최고령으로 인식하고
늙었어 어쩌지,
내년엔 어쩌지.

인식의 변화는 어디서 오는지
내가 경험하지 않으면 도무지 뭘 깨치지 못하는 성향.
전에 없던 폐쇄 공포를 느낄 만큼 작고 깊은 동굴에 들어간다거나
3천 년 전에 지어진 사원 천장의 프레스코 벽화를 올려다보는 시간: “진즉 봤다면 다른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을 텐데.”
아닐 수도 있고.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은 끊이지 않는다.

더 돈이 많고
더 사랑 받고
실컷 웃고
마음놓고 표현하고
글을, 소설을 잘 쓰고...싶다는 무한루프의 욕망.

불가능을 인지하면서
해놓고 후회하면서
실수를 반성하면서
차곡차곡 늙고 있다.

인생은 반복.
그 흐름을 끊고 싶어서 자꾸 낯선 곳에 오는 거겠지.
낯선 사람과 방을 쓰고 밥을 먹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겠지.

이 여행이 좋다.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12일 패키지 때는 몰랐는데 이번 여행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네.

*** 투어에서

캔 유 이매진?
캔 유 이매진.
캔 유 이매진!
데린쿠유(지하도시) 투어에서 가이드가 가장 많이 한 말.

“수 천 년 전 이 동굴에서 숨어 살았던 기독교인들을 상상해보세요. 굴뚝의 깊이가 100미터 200미터가 아니라 1,000미터가 넘는다고 상상해보세요. 이렇게 작은 구멍을 오가려면 몸이 얼마나 작았겠는지 상상해보세요.”

상상의 힘이 부족해서 나를 부끄러워하는 거구나, 난.



*** 숙소에서

매일 트위터를 보고 있다. “소설 쓰는 OOO입니다.”로 시작해서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로 끝나는 글들. 이 말을 남기려고 2020년 2월에 트위터에 가입한 사람들. 이 연대에 나는 숟가락도 얻지 못한다. 문학사상사와 조금도 닿은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나는 나. 나는 나를 어떤 소설가라고, 어떤 희망을 가진 자로 인식하고 있을까. 내게도 분명 꿈이 있는데. 여기서나마 쓴다.

문학사상사는 현재의 처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한 뒤 미래를 선명하게 밝혀 주십시오.#문학사상사_업무_거부


*** 숙소에서

또 라면을 먹기로 한다. 점심 먹고 서너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정이 끝났기에 일찍 밥을 먹고(어차피 두 개밖에 없어요, 얼마 안 돼.) 쉬기로 한다. 오후 다섯 시.

“이따 저녁에 먹으면 배고파서 많이 먹게 될 텐데 그땐 부족해요. 빨리 먹는 게 나아요.”
무슨 논리가 이래 ㅋㅋㅋ

라면을 끓인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지만 그렇다고 둘이 먹으라고 무심하게 말할 성격은 못 된다. 두 개를 알뜰히 나눠 먹고 차도 한 잔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이 정도 여행 오려면 돈이 좀 있으신 것 아닌가요?
-저는 손님들이 뭐하는지 궁금해요. 어떻게 사시는지.
-월급 깔까요? 얼마나 박봉이었는지?
-저도 영전교사(정식 교사는 아닌 영어만 맡아서는 선생님) 했었는데 돈이 정말 안 되더라고요.
-영전교사도 그렇겠지만 방과후도 케어해야 할 사람이 둘이에요. 학생이랑 부모. 특히 부모들이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몰라요.
-학교 석면공사로 이번 겨울방학 특강이 없어서 여행 왔어요. 그 학교랑 5년 계약했기 때문에 당분간 이렇게 긴 여행은 끝이에요.
-언어를 그렇게나 많이 할 수 있는데 적절한 대우를 못 받고 있다면 길잡이 말고 다른 걸 하는 게 어때요? 돈이 아니라면 마음으로라도 인정을 해줘야지 왜 능력을 깎아내리려고 해.

터키어를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하는 길잡이는 터키어. 아랍어. 영어. 불어. 러시아어. 스페인어를 한다고 한다. 언어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고. 이스탄불에서 3년, 카이로에서 2년 살았다고.

생활회화 수준에서 스페인어를 포기한 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데 그 계기는 남미 여행. 잠깐 눈 돌린 사이에 큰 배낭을 도둑 맞았고,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서 주변에 있던 그 나라 사람에게 도움+하소연+어이없음+기막힘의 눈빛을 보냈으나 대부분 어깨를 으쓱하며 내 일 아닌데? 내가 당한 거 아닌데? 하는 몸짓언어로 응답했다고.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남미를 별로 안 좋아하고, 다시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칠레에 대한 기억도 좋지 않고 멕시코는 좀 나았으나 페루며 쿠바 같은 곳도 여행자를 봉으로 알고 돈 뜯어낼 존재로만 보는 시선이 불편했다고 한다.-_-;;;

스페인어가 아쉬운 이유는 한국에 여행 오는 ‘스페인어 여행자’를 고객으로 가이드 할 수 있기 때문. 1일 기준 40만원이라고. “솔직히 터키어 정말 잘하지만 한국에서는 쓸모가 별로 없어요.” 기본 이상은 말할 수 있으니 스페인어를 좀 더 공부해서 써먹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한편으로 한국 살면서 외국인 관광가이드 하는 일이 재미있을까, 답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한국은 답답, 외국은 널널,이라는 이분법에 갇혀있는 듯도 하지만...

이번 여행 팩의 일행이 길잡이 포함 나까지 6명인데 나를 제외하면 모두 남미여행 경험이 있다. 패키지가 아닌 오지투어나 배낭여행팩으로 다녀오신 분들인데 이구동성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여행 인프라나 여행자들이 겪는 그 나라의 문화가 편안하거나 아름답진 않는 것 같다. 편안과 아름다움을 어떤 기준에서 논할 것인지는 오래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지만...

남미와 아프리카를 모두 근 한 달 일정으로 다녀오신 분에게 여행하기에 어느 쪽이 더 낫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아프리카’. 남미는 이동도 많고 먹을 것도 없고 블라블라. 둘에 하나는 “거기서 아팠어요”-_-;;;



*** 안탈루냐에서(바이러스 에피소드)

박물관 가는 길. 덩치 큰 남자가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면서 “코로나 코로나” 두 번 말했다.

길잡이가 호텔 로비에 나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억. 하면서 팔뚝으로 입을 가리더란다.(덴마크 할아버지로 밝혀짐) 호텔 직원이 중국인 아니라고,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나중에 와서 ‘그런 거’ 아니었다고, 너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라서 그랬다고 말하더란다.

다음 날 호텔 조식 먹는데 그 할아버지 우리쪽을 보면서 손가락을 입술에 댄다. “어제 그 할아버지예요.” 많이 불쌍해보였다. 옆에 할머니도 있었는데 같이 좀 그래 보였어.


*** 숙소에서

길잡이가 우리 숙소에 밥 먹으러 왔다. 침대가 딱 붙어 있는 걸 보고 “그래도 다행이에요. 두 분 사이가 좋아서. 별로인 분들은 이런 것도 불만스러워 하거든요.”

룸메 왈 “저도 그렇지만 언니도 모나지 않아서 그래요.”

모나지 않다는 말, 대체 뭘까.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뭐야, 나 엄청 모난 인간인데,” 했다. 뭐 때문에 간지러웠던 걸까. 뭐 때문에 삐딱한 기분이 들었던 걸까? 자기 자신을 모나지 않다고 말하는 순진한 발언? 나를 일면으로만 보는 것 같은 민망함?

칭찬으로 한 말이었으니 100% 감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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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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