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행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1. 2년 전 겨울, 거실에서 혼술을 하다가 대학원 원서를 썼다. 그해 부지런히 일해 오백만원을 모았는데 문득 한 학기 등록금 정도 벌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 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돈이 없어 내심 포기하고 있었는데 (박사 과정) 공부에 자신은 없었으나 외로웠기 때문에 욕심을 냈다.

3. 한해살이 프리랜서로서 다음 해에 대한 걱정이 컸고, 정기예금 쪽에 무겁게 마음이 끌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깟(?) 오백만원으로 곳간 두둑이 채운 안방마님처럼 부자된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진 않았다.

4. (가길 잘했지) 문학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있어 좋았다. 한탄도 공감도 배가 됐지만 메시지에 집착하는 나의 열등감과 플롯에 취약한 나의 성격을 부끄럽지 않게 인정할 수 있었다.

5. 두 번의 봄과 가을을 거치며 2년간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학교에 갔다. 한 과목(혹은 두 과목)씩 듣고 도서관에 있다가 11시에 주차장을 빠져나와 네온으로 빛나는 성수대교와 양화대교를 건너 인천으로 내려왔다. CBS FM에서는 주로 1990년대 가요가 흘러나왔다. 두 학기를 더 보내야 수료하지만 돈 내는 학기는 끝났다.

6. 지난해 겨울 파리 자유여행과 발리 장기여행에 이어 올해는 여행사 패키지로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12일 투어’를 했다. 환승 게이트에서 노란색 깃발을 손에 든 인솔자를 만나는 것부터 수십 명이 우르르 식당에 들어가 주는 대로 받아먹는 일 등이 첫날엔 엄청나게 어색하고 자존심 상했지만(?) 곧 적응했고 일행들에게 눈인사할 수 있었다.

7. 3일차엔가 큰소리로 웃으며 깔깔댔더니 가이드가 깜짝 놀라며 “목소리 처음 듣는 것 같아요. 그동안 왜 그리 말씀이 없으셨어요?” 한다. “말 터진 김에 노래 한 곡 할까요? 근데 나 노래는 존나 못해.” 난데없이 방정을 떨었더니 “어머. 이런 성격 너무 좋아. 내 스타일이야.” 가이드의 반응.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8. 아무튼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었고 머리 위로 햇살이 신의 가호처럼 내려앉았다. 따듯한 볕 덕분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떠돌면서 떠드는 늙은 양을 지켜주소서.

9. DSLR을 들고 왔는데 일행 중에 묵직한 카메라를 갖고 온 사람은 나밖에 없다. 카메라 때문인지 사람들은 내가 사진에 일가견 있는 줄 오해했다. 아는 거 없고 막 찍는다고 해도 안 믿는 눈치.

10. 핸드폰을 내밀며 사진 좀 찍어달라기에 성의껏 찍어주고 이따금 포즈도 제안했더니 어느새 사진 좀 찍는 여자가 되었네? 아무도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11. 전직 공무원과 현직 교사와 사업가 부부와 명예퇴직한 사람들이 경력과 연금, 사는 곳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잰걸음으로 앞서가거나 가만히 서서 한 곳만 바라보았다. 거기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다르니까 소리도 다르군. 당연한 걸 자각하면서 눈으로 새를 좇았다. 다른 새야, 다른 새야, 안녕? 나는 다른 나야. 다른 나라에서 만나니 참 반갑구나.

12.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을 거쳐 왔다. 내일은 여행 마지막 날이다. 리스본 아웃. 모레 암스테르담 일일 투어 후 금요일 오후에 귀국한다. 주말 이틀 쉬고 월요일엔 다시 제주행 비행기 탑승 예정. 조카 둘과 엄마, 나, 넷이 떠난다.

13. 다녀와 1월 말에는 또 터키와 그리스에 간다. 터키+그리스 20일 자유여행 예약은 좀 충동적이었는데 한국에 있는 게 무서워서(?) 거금(?)을 들여 예약했다. 그 거금은 나의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여서 몇날 며칠 안전한 선택일지 아닐지 재고 또 쟀다. 동전 앞면이 나오면 가기로 하자, 뒷면이 나오면 가기 말기로 하자고 마음먹고 하늘로 던졌는데 바닥에 떨어진 동전은 뒷면을 내보이고 있었다.

14. 온갖 기운을 모아서 친 점도 아니잖아. 이건 무효야, 무효.

15. 고민도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니냐고, 그건 끌렸다는 뜻이라고, 끌렸다면 떠나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도망치는 게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떠남은 버리는 것도, 뭘 찾는 것도 아니고 그저 ‘How about now’ 지금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 속삭이면서. 거듭거듭 나를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16. 사랑해야만 한다.

17. 여기까지 오느라고 애썼어.

18. 방어 태세, 언제나 가드를 올리고 있었다. 팔을 치켜들고 주먹을 불끈 쥐고 덤비기만 해보라는 자세로 살았다. 늘 긴장해 있었고 그렇게 얼굴을 가렸다.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주먹을 까맣게 칠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내 얼굴은 안색이 나빴을 것이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가드를 내리고 싶다. 어떤 사람이든 상대를 정확하게 마주하고 싶다. 나를 공격하는 상대는 어쩌면 나뿐일지도 모른다. 수차례 팔과 주먹을 내려뜨리고 싶었으나 웬일인지 쉽지 않았다. 거울을 보면 나랑 똑같이 생긴 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19. 이번 스페인 여행 중에 <용의자의 야간열차>를 읽었다. 소설의 화자는 주인공을 2인칭 ‘당신’으로 지칭하는데 열세번째 바퀴가 굴러갈 동안 성별도, 나이도, 당신이 왜 당신이어야만 하는지도 공개되지 않는다. 그저 작가의 선택이라고만 생각했고 문장이 매우 세련되고 차분했기 때문에 쏙 빠져들어 이야기를 따라 갔다. 열두번째 바퀴에서야 작가는 이인칭으로 부른 이유를 밝힌다.

20. 뭄바이행 기차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손톱깎이가 있느냐고 묻는다. 당신은 기꺼이 배낭에서 꺼내주는데 손톱을 다 깎은 상대가 손톱깎이가 마음에 든다며 자신에게 팔라고 한다. 마침 경비가 부족했던(남은 돈이 거의 없었던) 당신은 얼마를 줄 거냐고 묻는다. 상대는 돈 대신 열차표를 주겠다고 한다. 실망한 표정을 지은 당신에게 상대는 자신이 갖고 있는 건 보통 차표가 아니라 부적 같은 것이고, 이걸 지니고 있으면 계속 철도를 타고 다닐 수 있다고 말한다.

21. <“계속이라니. 언제까지요?””이 여행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여행이 찾아옵니다. 그게 끝나면 또 바로 다음 여행이 시작되죠. 그렇게 끊임없이 여행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날 나는 당신에게 영원한 승차권을 내주고, 그 대신 자신을 자신으로 여기는 뻔뻔한 넉살을 사들여 ‘나’가 되었다. 당신은 더이상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지 않게 되어, 언제나 ‘당신’이다. 그날 이래로 당신은 줄곧 묘사되는 대상이 되어, 2인칭으로 열차를 탈 수밖에 없게 되었다.>

22. 자신을 자신으로 여기는 뻔뻔한 넉살. 23. 나도 누군가에게 나를 팔고 싶다.

24. 나와 거리를 두고 싶고, ‘당신’이 되고 싶고, 조금은 객관적으로 나를 보고 싶고, 무엇보다 자기연민을 그만두고 싶다.

25. 나는 남들 앞에서 늘 나를 낮추려 애썼지만 겸손이 아니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자기연민, 자기기만이었다는 걸 이제 알겠다. 26. 지옥 속에서 나를 안아줬다면 그가 악마라고 해도 따라갈 수 있어야지. 그리워할 수 있어야지. 목청껏 부를 수 있어야지. 죽음에 입맞출 수 있어야지.

27. 나탈리 포트만의 마지막 미소가 잊히지 않는다.

28. 스페인에서 포르투갈 넘어오면서 본 영화 ‘고야의 유령’ 이야기다.

29. 너무 서럽네, 사랑.

30. 그립다, 보이지 않는 나의 유령.

스페인-포르투갈 국경 넘는 길. 휴게소에서 마주한 일몰 2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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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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