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보다 더 ‘작은’ 소설이 있습니다. 단편소설하면 이 정도는 돼야지 했던 분량이 원고지 100매에서 70매, 그리고 15매로 줄어들고 있다네요. 나뭇잎에 빗댄 엽편(葉篇), 손바닥 크기 분량의 손바닥소설, 스마트폰 시대에 발맞춘 스마트 소설, ‘현상의 강렬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의 ‘플래시픽션’, 그밖에 미니픽션, 서든픽션, 마이크로픽션, 마이크로스토리, 쇼트쇼트스토리, 엽서소설, 프로즈트리(Prosetry), 담배짬소설, 커피잔소설이라는 명칭도 있습니다. 휴…. 작품의 분량으로, 이미지로, 재치로, 새로운 형태로, 시대를 반영한 이름 등등으로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네요.
짧은소설은 20세기 초 중남미에서 시작됐습니다. 보르헤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작품을 남겼는데, 한 줄짜리 극단적 분량도 있었다고 합니다.
“깨어나보니 공룡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과테말라 작가 아우쿠스토 몬테로소의 작품 ‘공룡’입니다. 시도, 아이디어 조각도 아닌 ‘소설’입니다. 일곱 단어로 된 이 글은 반론 없이 ‘픽션’으로 인정받았고, 몇 백 배 단어를 사용한 작품 해석이 쏟아졌습니다. 아래 패러디 문장을 한 번 보시죠.
“공룡이 깨어났을 때, 신들은 아직도 저기 있었다. 서둘러 나머지 세상을 창조하면서.”(에두아르도 베르티의 ‘또 다른 공룡’) “작가가 생애에서 가장 짧은 단편을 쓰고 있었을 때, 죽음 역시 가장 짧은 작품을 쓰고 있었다. 이리 와.”(후안호 아바네스의 ‘결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공룡은 저기 없었다.”(파블로 우르반이의 ‘공룡’)
짧은소설은 오랫동안 본격 문학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신속성, 명료성, 간결성 등이 정보화 사회의 속도 및 영상문화와 결합해 주요 서사 장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는 “작가의 세계관과 문학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을 응축시켜 놓는 데 가장 적절한 문학적 방법으로, 분량만으로는 콩트와 비슷하지만 극적 반전을 이루려는 콩트보다 문학적 깊이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네요.
우리나라의 짧은소설 흐름, 최근 쏟아져 나온 작품집 등을 언급하기 전에 프랑스에 있는 ‘소설 자판기’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버튼을 누르면 문학작품이 나오는 일명 ‘짧은 이야기 배급기(Distributeur d'histoire courte)’네요.
기차역 대합실에 희한한 기계가 놓여 있습니다. 1분, 3분, 5분의 버튼 중 하나를 누르면 선택한 독서시간에 맞는 길이의 이야기가 영수증처럼 흘러나옵니다. 종이 위쪽에는 작품의 장르와 제목, 작가 이름이 인쇄돼 있고, 그 아래는 한 편의 작품입니다. 어떤 작품은 농담 같고, 어떤 작품은 한 편의 짧은 로맨스며, 한 편의 짧은 시도 있다고 하네요.
이 기계와 이야기를 공급하는 ‘short edition’은 프랑스의 소도시 그르노블에서 글쓰기 플랫폼을 운영하던 일종의 출판사였습니다. 작가로 등록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글을 올리면 회원들이 점수를 매겨 추천하고, 회사의 에디터들이 좋은 글을 골라 온라인으로, 또 팟캐스트로 공급하는 사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누군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단편소설 자판기’를 설치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농담처럼 이야기했고, 장난삼아(?) 실현한 농담이 예상 외로 히트를 칩니다.
승객은 열차를 기다리며 보내야 하는 시간을 스마트폰이 아닌 ‘문학’과 함께 보낼 수 있고, 철도회사는 예술작품 배급과 후원이라는 ‘의미 있는’ 사업으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며, 작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었네요.
이 사건은 프랑스 언론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보도됐는데 뉴요커에 실린 기사를 본 샌프란시스코의 한 영화감독이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곤 기계를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죠. 그 감독이 누구냐고요? <지옥의 묵시록>, <대부> 등을 만든 사람이네요. 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그는 단편 문학은 영화를 구상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된다며 기계에 관심을 갖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판기로 과자, 콜라, 커피가 아닌 예술 작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 출판사의 설립자가 코폴라 감독의 메일을 받고 미국에 가서 그를 만나 기계를 설치하는 이야기가 담긴 영상입니다.
자판기를 통해 소개된 작품은 약 10 유로 내외의 고료를 받습니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여러 작품이 선정된 작가들도 많고, 무엇보다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작가들이 많다고 하네요.(14,264명의 작가와 20여만 명의 플랫폼 독자, 6만 여편의 작품이 있다) 2015년에 시작된 이 배급기는 현재 프랑스 전역 100여곳 이상의 기차역,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쇼핑센터 등등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판기 이용료는 없고요.
한국 작가들의 초단편집이 줄줄이 출간됩니다. 지난해에 나온 소설가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조경란의 <후후후의 숲>, 최민석의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에 이어 김솔, 안영실, 구자명, 성석제의 책도 나와 있네요. 출판사 문학동네 관계자는 “소셜미디어 등으로 인한 단문(短文) 학습 탓에 독자들이 점점 긴 글을 외면한다”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도 짧게 여러 편을 쓰는 게 유리한 만큼 앞으로 초단편이 유망 장르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탁, 사건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단편이 파헤치는 것이라면 콩트는 발견하는 것, 타격을 주는 것이다. 탁! 그렇게만.”(소설가 이기호)
“짧은 소설은 떠올렸던 몸피 자체의 보존성이 높다. 풍요로운 육체성은 못 갖추지만 정곡을 찌른다.”(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이장욱)
“보통 소설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단계가 있다면 초단편은 이 중 하나만 떼서도 쓸 수 있다. 짧다 보니 이미지나 즉물적 느낌이 강해 형식도 자유롭고, 단편과 중장편의 확장도 용이하다.”(소설가 조경란)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장르별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장르의 분열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 추세대로라면 소설은 더 짧아질 것이며 장르에 대한 개념도 점차 바뀌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짧은소설에 대한 독자(댓글)의 반응은 어떨까요.
“난 이런 걸 소설로 보지 않는다. 짧은 글만 읽는다는 독자들은 원래 책을 안 읽는 사람일 뿐.”, “정말 한심한 작태이다. 단시간 내 흥미를 추구하는 독자층의 문제라고? 단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준이 안 되는 저급한 돈벌이 추구일 뿐.”이라는 부정적 의견과 “무언가 대세가 된다는 건 시장의 수요가 있어서 그런 건데. 대세를 조작할 수도 없는 거고. 독자들이 짧은 글을 원한다는데 저런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 에헴 에헴 그건 소설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ㅋㅋ 팔릴 만하면 팔릴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망하겠지. 시장원리로. 저런 책이 무슨 노벨문학상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등의 현실적 관점이 있네요.(아이디 ocad****, kung****, flow**** 님 등)
짧은소설이 부상한(혹은 21세기 문학을 주도하게 된) 이유는 온라인에서 유통과 소비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담배짬소설’이나 ‘플래시픽션’ 등은 모두 글을 모으는 온라인 창구가 있습니다(smokelong.com, www.flashfictiononline.com, www.vestalreview.net, www.365tomorrows.com). 짧은 글에 주는 ‘마이크로 어워드’도 2007년부터 온라인에서 수상작을 발표했고요(www.microaward.org).
‘낙농콩단’(conte0303.tistory.com)에 ‘콩트’를 쓰는 김영준 씨가 사이트에 모은 10∼20장에 이르는 콩트는 233편에 이릅니다. 미니픽션 연구소(www.minifiction.com)는 2004년 10명의 회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니픽션을 모집하고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네요. 소설가 서진 씨가 운영하는 ‘1pagestory’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A4용지 한 면에 들어가는 원고지 10장 분량의 원고를 모집합니다. 현재까지 730편의 글을 수집했다네요. 한 사람당 하나의 글만 등록되니 전부 730명의 글입니다(pagestory.egloos.com).
“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
스페인 작가 벨타사르 그라시안(1601-1658)의 말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네요.
“매사에는 양면이 있다. 가장 좋고 유리한 것도 그 칼날 쪽을 붙들고 있으면 고통이 되고, 반대로 불리한 것이라도 그 손잡이를 잡으면 방패가 된다. 매사를 불리하다 생각하며 근심하지 말고, 유리한 쪽을 바라보라.”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는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 몬디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은 픽션보다 논픽션이 인기인 것 같더군요.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경제경영책이 많이 팔리는 것 같은데, 이탈리아는 그런 책이 인기가 없어요.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우리의 독서문화는 다소 건조하고 현실적이고 쓸쓸한데 이탈리아는 낭만적이네, 하는 얼토당토아니한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서툰 부러움’ 같은 감정이 스쳤달까요.
한참 짧은소설 이야기를 했지만 길고 짧은 게 또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긴 게 좋으면 긴 걸, 짧은 게 좋으면 짧은 걸 읽으면 되지요. ‘어쨔던동’ 우리나라에서도 소설이 좀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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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다음과 같은 기사와 블로그 등을 참조하여 작성했음을 밟힙니다.
브런치 2017.2.25.
2. 원고지 100장→50장→20장… ‘손바닥 소설’이 쏟아진다
조선일보 2017.2.8.
21세기 문학을 주도하는 ‘짧은 소설’
한겨레21 2012.10.23.
4.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지금의 나로 이끈 다섯 번의 선택
‘비정상회담’의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 몬디의 성장과 독서
북클럽오리진 2017.3.10.
'작가의일상 > 큐레이션 콕콕(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통신3.0')'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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