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당선작] 그 점방, 그 햇살_김정은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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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동창 지운이 말했다.

“넌 시골이 고향이라 좋겠다. 가끔 이나마 가서 쉬고 올 시골이 있다는 게 참 부러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앞을 보며 나란히 걷던 지운이는 다시 말했다.

“난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겁쟁이라고 생각해.”

‘겁쟁이?’ 과연 그런가 속으로 생각하며, 난 그저 소리 없는 미소로 지운이의 말에 응대했다.

지운이는 학부시절 시를 썼던 친구이고, 지금은 여러 회사의 사보를 만드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환경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 친구로, 환경단체에 정기 후원금을 내고 단체의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여린 심성을 가진 아이어서, 자주 내 고민을 털어놓곤 했고, 적절한 위로도 얻었다. 이렇게 가끔 가볍게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할 수 있는 친구. 고향이 서울인 지운이는 늘 도시를 경멸하며 시골을 예찬했고, ‘언젠가는 귀촌하겠다’는 말도 여러 번 한 터라, 나도 ‘지운이가 시골생활에 대한 환상이 있지’, ‘언젠가 내려갈 수도 있겠지’ 생각을 했다. 그런 그에게 고등학교 때까지 읍 단위의 시골에서 산,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 스타킹을 신고 손 모를 내봤다고 하면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고, 라디오가 아닌 개구리 소리,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단 얘기를 하면 낭만적이라며, 그런 게 ‘진짜 삶’이라고 감동하곤 했었다. 지운이에게 시골은 인간적이고도 완벽한 곳인 모양이었다.



그랬다. 시골에서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운치가 있었다. 허구한 날 밤하늘에 촘촘히 수놓인 별들을 볼 수 있었고, 비가 오면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이 물이 개울로 모이고 강으로 흐르고 바다로 가 다시 하늘로 증발하겠구나, 자연의 이치도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나는 지운이가 말한 것처럼, 가끔 고향에 내려가 편히 쉬고 오지 못했다. 아니, 집에 내려가야 하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날이 되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늦게 내려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금방 올라올 수 있을까 그 고민만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시골, 고향은 낭만 보다는 무지, 폭력, 유년시절의 무기력함이 얼룩진 곳이었다. 시골에 대한 환상이 큰 지운이에게 말하지 못한, 외면하고 싶은 공포의 공간.

이는 다 우리 옆집에 사는 병순 엄마 때문이다. 내가 그곳에 내려가 아직도 얼굴을 봐야 하는 병순 엄마. 성별을 분간하기 힘든 짧은 커트, 작은 키에 마른 몸을 가진 병순 엄마는 늘 일바지에 헐렁한 나일론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보다 더 한결 같았던 것은 멍한 눈. 어디를 쳐다보는지 모르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두무리’가 아닌 어느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한 눈. 쓸쓸하고 겁먹은 듯 한 눈빛으로 조용히 살 수 밖에 없던 사람, 병순이 엄마.



병순 엄마는 귀머거리였다. 말을 할 수는 있으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누구에게도 시원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여자. 아이를 가지지 못해, 더 땅만 보며 걷다가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쉬쉬하며, 5살 남자아이를 입양해 키우던 여자. 동네사람들은 병순 엄마를 연민의 눈으로 봤지만 그 누구도 가까이 하려 하지는 않았다. 병순이 아빠 때문이었다. 늘 홀로 고주망태가 되어 허우적허우적 걸어 다니던 새끼. 다른 사람과는 말을 섞지도 않으면서 작고 마른, 듣지 못하는 병순 엄마만 개 패듯 패던 놈. 술에 취해 고부라진 혀로, “돈이 뭐야? 그게 다 뭐야? 씨팔”을 외치던...

엄마와 다른 아줌마들이 소곤거리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병순이 아빠도 불쌍하지 뭐. 그 많은 재산을...”

“누가 아니래? 피붙이가 그렇게 사기를 치고 달아났으니 속이 속이겠어?”

“동생 놈이 다 갖고 날라, 이제 남은 건 사는 집하고 집 뒤에 땅뙈기 몇 마지기래.”

“아, 그래도 저렇게 술만 마셔대다가는 지 몸만 상할 텐데…….”

“누가 아니래? 딱하지 뭐.”

‘그랬구나, 병순 아빠도 가슴에 묻히는 한이 있는 사람이구나.’ 어른들의 얘기를 엿들은 여덟, 아홉 살의 나는 술에 절어 있는 병순 아빠의 몸짓이 왜 그리 허깨비 같은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혼자 길을 가다가 병순 아빠를 마주치거나, 혼자 점방을 보고 있을 때, 병순 아빠가 술을 사러 오면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부터 나에게 점방을 맡기고 밭일을 하러 가곤 했었다. 물려받은 땅이 없는 농사꾼이던 내 아버지는 동네에 작은 점방을 맡아 운영했다. ‘구판장’이라 불리는 마을 공동체의 점방으로, 돌아가며 운영을 하고 수익금의 일부를 운영자에게 주는 동네 유일한 점방이었다. 가난한 시골 마을의 유독 더 가난했던 내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의 배려로 오랫동안 그 점방을 맡아 운영을 했고, 한 달에 한 번 적은 현금이나마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농번기가 되면 엄마, 아빠가 모두 밭일에 매달려야 했다. 뜨거운 햇빛 아래에 마치 들짐승들처럼 땅에 붙어 비닐을 씌우고, 약을 주고, 김을 매고 해야 했다. 그래야 가을에, 고춧가루라도 빻아 엄마가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 수 있었다. 콩이라도 심어야 메주를 쑤고 된장을 담가 읍내 사람들에게 팔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먹고 살 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농사일이야말로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이 제격인 일이다. 비닐을 씌울 때도 양쪽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김을 맬 때도 위, 아래에서 매 나가야 한 나절에 끝낼 수 있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새벽같이 함께 밭으로 나가야 했다. 혼자 하면 늦어지고 때를 놓쳐 파종도 수확도 힘들어지니, 돈 때문에 밤새 싸우고도 같이 나서야만 했다. 그럼 나는 점방을 봐야 했다. 농사를 거들 힘도 기술도 없으니 자연스레 그거라도 해 밥값을 해야 했다.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나의 부모는, 그것이 넓은 의미의 ‘아동학대’라는 생각은 할 줄 몰랐다. 어린 자식에게 밭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닌, 그나마 가장 편한 일을 맡기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그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뙤약볕 아래에 구부리고 앉아, 하루 종일 흙을 파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었다. 그러니 손님이 올 때마다 무섭고, 떨려도 그건 나의 문제이지 부모의 무지와 가난 때문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가 나만 점방에 남기고, ‘이따 올게. 니가 가게 좀 봐라.’는 말만 남긴 채 문을 나서면 무서웠다. 물건의 가격도 모르는 게 더 많았고, 없는 물건을 누군가 달라고 할까봐 그것도 무서웠다. 또 다음에 줄 터이니, 외상으로 물건을 달라고 하면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든 것이 떨리고 두려웠다. 그래서 어린 나는, 차라리 외로워도 좋으니 사람 없는 곳에 나 혼자 있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다. 자주.



그 날도 그랬다. 엄마, 아빠는 아직 눈도 뜨지 않은 나에게, “밥 상 위에 된장해서 밥 먹고, 가게 좀 봐라.”는 말을 속삭이듯 하고 밭으로 갔다. 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고 물에 말아 먹고 점방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빨리 어두워져 엄마, 아빠가 돌아왔으면, 그때까지 아무도 이 점방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오후 두 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병순 아빠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은 풀리고, 걸음은 비틀거렸다. 예전에 사다 놓은 술을 마시다 모자라서 더 사러 온 모양이었다.

“소주 이홉드리”

짧게 말했다. 작은 나는 벌벌 떨며, 푸르고 투병한 소주병을 찾아 조심스럽게 그에게 내주었다.

“잔도 하나 줘.”

이 명령은, 점방 구석 간이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가겠다는 얘기였다. 울고 싶었다. 고주망태와 적어도 30분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니. 하지만 난 그를 보낼 아무런 방법도 힘도 없었다. 그저 수동적으로 소주잔 하나를 찬장 안에서 꺼내 건내줄 뿐.

그는 잔을 들고 간이 식탁으로 가 앉았다. 나지막히,

“씨팔!”, “돈이 뭐야? 돈이 뭔데?”

서럽고 억울한 그의 술주정이 들려왔다. 간이 식탁 위의 넓은 창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빛은 식탁과 그를 처연하리 만큼 환하게 비추었다. 그때, 점방 문이 열렸다. 병순엄마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내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병순 엄마는 병순 아빠 쪽으로 걸어갔다.

“병순아부디, 가여. 딥으로 가여.”

병순 엄마는 병순 아빠의 한 쪽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병순 아빠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붉어진 눈으로 병순 엄마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냅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힌 큰 손바닥으로, 병순 엄마의 뺨을 후려쳤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던지, ‘찰싹’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병순 아빠는 병순 엄마의 다른 쪽 뺨을 후려쳤고, 병순 엄마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꺼이꺼이 흐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울고 있는 병순 엄마를 보고 말았다. 손이 떨렸다. 무서웠다. 마치 내가 맞은 것처럼 얼굴이 맵고 얼얼했다. 무섭고 화가 나는데,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밖으로 나가 누구라도 데려와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초여름의 밝은 햇빛 속에 남편한테 폭력을 당하고, 피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울고 있는 병순 엄마에게 둔 시선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흐느껴 울던 병순 엄마는 두 손으로 눈물을 천천히 훔치고는, 다시 병순 아빠의 팔을 잡아끌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운 병순 아빠는 자신이 내리친, 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점방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야 나는 울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개새끼, 씹새끼” 쌍욕이 터져 나왔다. 동네 어딘가에서 들은 징그럽고도 더러웠던 욕들이.



그 날 저녁, 어김없이 일에 지친 엄마, 아빠는 간신히 저녁을 먹고 양치도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맨바닥에 이불만 덮고 잠들어 버렸다. 좁고 캄캄한 방 안에서, 아빠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병순 엄마가 도망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날 위해서 제발 이 ‘두무리’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7월, 엄마의 생일이어서 시골에 내려왔다. 아침 일찍 미역국을 끓여 엄마, 아빠와 식사를 하고 점심 먹기 전에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서운한 내색은 하지도 못하고,

“그럼 푸성귀나 좀 가져가.”

하며, 밭으로 나가 오이며 상추, 가지를 따왔다. 난 걸레나 빨아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세숫대야를 들고 집 앞 개울가로 갔다. 일주일 동안 내린 장마로 개울물은 빨래하기 좋게 불어 있었다. 흙먼지며 엄마아빠의 흰머리가 잔뜩 묻은 걸레를 개운하게 빨았다. 흐르는 개울물에 손을 적시니 시원하고 좋았다. 빨래를 마치고 세숫대야와 비누 곽을 챙겨 일어나는데, 백 미터 정도 앞에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난 금방 알아차렸다. 누구인지. 여전히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커트머리, 움츠린 어깨와 머문 곳 없는 눈길. 병순이 엄마였다. 병순 엄마는 여전히 작고 말랐고, 일바지에 나이롱 티셔츠 차림이었다. 병순 아빠가 간암으로 죽은 지 십년 가까이 되어간다. 병순 엄마는 병순 아빠가 죽고, 병순이도 기숙사가 딸린 기술학교로 간 뒤 줄곧 혼자 지내고 있었다. 집 앞 텃밭을 가꾸고, 나라에서 장애인들에게 주는 공공근로를 하며 여전히 조용히 살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병순 엄마를 기다렸다. 인사를 하고 싶었다. 아니 사과를 하고 싶었다. 병순 엄마는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똑같은 속도, 똑같은 표정으로 내 옆을 지나갔다. 난 병순 엄마의 등 뒤에서 목례를 했다. 그리고 작지만 소리 내어 말했다.

“아줌마, 미안해요.” 병순 엄마는 미동 없이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끝맺지 못한 말을 이어 했다. 마음속으로.

‘그때 내가 아줌마를 끌고 점방 밖으로 나갔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아저씨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해요. 아무 것도 못해서. 저도 너무 무서워서 아무 것도 ......’





“집엔 잘 갔다 왔어? 쉬고 와서 좋았겠네.”

난 또 그냥 웃고 만다.

“나중에 나 시골 가서 살게 되면 너 놀러 와라. 와서 상추도 심고 나 고추 심는 것도 알려주고 해라.”

“아니. 나 안 갈 거야. 너 시골 내려가면 나 놀러 안 갈 거야.”

“왜?”

“난 시골 싫어. 그냥 지긋지긋해.”

지운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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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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