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안도현은 시인 백석을 ‘사부’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느 강연 자리에서 “오로지 그의 시를 베끼고 싶었다”고 고백하기도 했고요. 시인은 1980년 대학 1학년 때 처음 백석의 시 「모닥불」을 읽었고, 그 시는 스무 살 청년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당시엔 정부 조치로 백석의 시를 맘놓고 읽을 수 없었고 안도현 시인은 은사가 보여주는 시를 몰래 노트에 옮겨 적었대요. “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백석은 그저 하고많은 시인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 한겨레출판, 2009. 65쪽.)
위의 책에서 시인은 필사를 “참 좋은 자기학습법”으로 소개합니다. 눈에 띄는 시를 만나면 필사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하죠. 그래야 시집이라는 상자 속에 갇혀 있던 시가 날개를 달고 가슴으로 날아온대요.
시인은 백석의 시를 자신의 시집 제목으로 삼기도 하고(『모닥불』, 1989년), 백석의 호흡을 닮은 시를 여러 편 쓰기도 하면서 백석을 향한 짝사랑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에, 이런저런 방법으로 애정의 흔적을 남기면서 ‘또 다른’ 시인으로 이름을 남겼죠.
소설가 신경숙도 필사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세밀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다. 나는 이 길로 가리라.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아름다운 그늘』, 신경숙, 문학동네, 2004. 155~156쪽.)
그녀는 서정인의 강(江), 최인훈의 웃음소리,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제하의 태평양, 오정희의 중국인거리, 이청준의 눈길, 윤흥길의 장마, 최창학의 창(滄), 강호무의 화류항사 등을 옮겨 적었다고 해요.
『아름다운 그늘』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예전에 소설가가 남긴 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필사에 관한 대화 끝에 인쇄된 활자를 손으로 베껴 적고 본인이 쓴 글을 읽으면 인쇄된 작품과는 다른 느낌이 들고, 그렇게 새롭게 보고 느껴지는 데서 배우는 게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필사 노트를 버리거나 하지 않고 이따금 들춰 ‘자기 손으로 쓴’ 작품을 읽어본대요. 그럼 또 다른 감동이 오고…
저도 작가가 되고는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 도서관에서 톡톡 책상을 두드리며 연필로 꾹꾹 눌러쓴 노트를, 이십 대의 제 손글씨가 담긴 오래된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표절 사태’로만 신경숙을 박제해, 필사하다가 표절까지 한 거 아니냐고 삐죽 가시를 세우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선배 소설가 중 한 분인 신경숙의 작품을 옮겨적기도 했던 사람으로서, 작금의 평판은 잠시 접어두고 한때 필사에 진심이었던 작가의 마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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