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수상작_오늘의 운세도 괜찮습니다(하정주)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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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운세도 괜찮습니다

 

하정주

 

 

 

선생님, 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사실 저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손님 관상을 보니 곧 일이 풀릴 조짐이 보이네요. 우선 운이 풀리게 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존재들에게 인사를 건네세요. 풀 한 포기, 지나가는 고양이, 흐르는 바람, 집 앞 빵집의 구수한 빵 냄새에도 인사를 건네다 보면 그중에 귀인이 있습니다. 29일만 해보세요.”

 

낡은 옷이지만 그래도 잘 다려진 옷을 입고 있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많이 보이지만 끝이 잘 다듬어져 있다. 오래 신은 신발이지만 앞코가 잘 닦여 있고, 손이 무디고 주름이 많지만 단단해 보인다. 두 손을 잘 모으고 이야기를 경청하며, 목소리에 힘은 없지만 정중하고 상대방을 대하는 말 한마디에도 예의가 있다. 지나가는 길에 만난 인연이지만 이죽대며 점괘를 비웃지도 않고, 이런 것들이 답이나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며 불신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힘겨움은 있지만 막다른 길을 만나면 되돌아 나오는 현명함을 가진 사람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어둠이 가까이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기적들을 놓치게 하지만, 영원히 기회를 잃고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어낸 것들은 더 사소하고 많았지만 일일이 설명해주진 않았다. 때론 너무 많은 것을 읽어낸다는 것은 그만큼의 벽돌로 쌓은 틀에 갇힌다는 것이다. 틀에 갇혔을 땐, 현재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좋은 운을 가진 사람보다 나쁜 운을 향해 걷는 사람들은 나가는 길을 밝히는 사소한 것들이 주는 작은 밝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거군요. 다행이네요. 정말 답답했거든요. 원래 이런 것에 관심 없었는데, 나쁘지 않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미 길을 밝힐 등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등불에 작은 불씨를 건네받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건네지는 작은 불씨를 무심하게 툭 쳐내며 쓸모없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귀인은 이 사람인가보다.

 

좋아하는 것, 진심으로 아끼는 무엇인가가 있는 사람에겐 늘 나아갈 길이 있어요. 저야말로 도움이 되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어 제가 더 감사해요.”

 

중년 남자는 주머니에서 꺼낸 지폐를 잘 펴서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내 앞에 잘 놓아두고 조금은 가벼워진 얼굴로 일어섰다. 무엇을 샀는지 모르겠지만 옆에 내려놓았던 검은 비닐봉지를 잘 챙겨 오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길게 늘어선 색색의 파라솔 아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엇인가 사고팔고 있는 곳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보았는지 손을 흔드는 뒷모습을 보며 눈인사로 배웅했다.

 

그 손님을 끝으로 한동안 점을 보려는 사람이 없다. 테이블 위에 엎드려 햇살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포장을 뜯지 않은 김밥 한 줄을 꺼내 입 안 가득 씹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니 구경하는 손님이 꽤 늘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표정들을 보는 맛이 갓 담은 오이피클처럼 아삭하고 상큼한 기운을 가져온다. 김밥이 달고 맛있다. 한 줄의 김밥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늘 내 자리는 명당이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행사를 운영하는 측에서 초대한 인디 밴드가 한 참 악기와 스피커를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음악을 듣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건반을 가볍게 두드리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공연의 준비단계를 날 것 그대로 볼 수 있는 이 시간에 점을 본다는 사람도, 시야를 가리며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는 것은 기쁨이다.

 

어제 본 오늘의 운세는 특별한 일이 없을 평범한 점괘였다. 마치 여름에 물 조심하고 겨울에 불조심하라는 것 같은 당연하지만 풀이하기 애매한 부분이 가득했다. 주로 이런 점괘가 나올 땐 해석하는 이의 몫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 점괘를 본 나보다 너그러워져 있었다.

이런, 작은 기적이 벌써 내게 발현되는 중인가. 오늘 첫 손님에게 불을 건네주다 나도 하나 얻었나 보다.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고개를 까닥이고, 발끝을 허공에 휘휘 저어본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는 데 불쑥 무릉도원을 헤집고 나타난 동자들처럼 단발머리의 볼이 핑크빛으로 볼록하게 솟아오른 자매가 눈앞에 툭 튀어나왔다.

 

언니! 오늘 손님 많았어요?!”

 

양손 가득 무엇인가 사 들고 나타난 자매는 가을바람에 춤추는 들꽃처럼 흔들거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재잘거린다.

 

언니! 저도 점 보러 왔어요! 저 궁금한 사람 생겼어요!”

맞아요! , 썸 타는 남자 생겼데요! 저는요, 그냥 돈은 언제 버는지 알려주세요. 대박 운이요!”

얘 먼저 보고 저 볼래요! 너 어서 물어봐!”

 

작은 폭죽처럼 눈부시게 쏟아지는 질문이 술에 취한 듯 덩달아 설렌다. 사랑에 빠진 아이는 울렁이는 달콤한 향을 뿜으며 맞은 편 자리에 앉고, 사고 싶은 것이 많아 돈이 필요한 아이는 사이다처럼 톡 쏘는 향을 뿜으며 옆에 붙어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이것저것 만져본다.

기분 좋은 설렘이 가진 질문들은 즐겁다. 무료한 일상에 텁텁해진 입맛을 사로잡는 코끝 알싸한 겨자소스 냉채 요리 같다. 눈이 번쩍 뜨이고 코가 뻥 뚫리고 젓가락질이 빨라지는 순간처럼 점괘를 늘어놓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말이 빨라진다.

고민스러운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작은 것들의 기적과 기쁨이 그들을 색이 선명한 풀처럼 꽃처럼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다. 그 기운이 덩달아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파도를 타듯 그렇게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관심을 보이는 손님이 있으면 자매는 손님인 척 호객행위를 하는데, 같은 패가 되어 의미심장한 웃음을 입가에 묻히고 점괘가 잘 맞는 집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권유를 한다.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어 얼렁뚱땅 그렇게 마당극이 펼쳐지는 데 속아 몇몇, 점사를 보는 사람이 더 생겼다.

 

그렇게 손님이 바뀌고, 또 한가한 시간이 온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은 잠시 내려놓는다. 별것 없지만, 매 순간 별것 같은 순간이라 휴대폰을 들어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 본다. 잘 찍은 사진이라기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라, 마켓을 운영하던 친구가 홍보할 때 필요하다는 쓸모 있는 사진은 하나도 없다. 그저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낡은 휴대폰의 저장 공간을 빌어 담고 싶을 뿐이다. 공기, 냄새, 기운, 소리, 흐름, 흔들림, 그리고 사람들.

 

좋은 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한번쯤 여름의 고된 시련을 이겨낸 이들이 작은 이익을 탐해도 좋다고 하늘이 허락하는 시기이다. 외로워하는 이도 많지만 그 틈을 차지하고 들어오는 인연을 잡는 이도 많다. 해가 질 무렵 마지막으로 더, 마지막으로 더, 더 이상 말해 줄 것도 없는, 나도 모르는 인연에 관한 운세를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읊어주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자매들을 보며 판을 접는다.

 

무거운 짐을 들 때 어디서 후루룩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힘을 보태고, 눈치껏 숨어있던 게으른 고양이도 꼬리를 치켜세우고 사람들을 쓰윽 지나쳐 어디 빠진 것은 없나 둘러본다. 좋은 장소도 있지만 나쁜 시간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있었다. 겨우 하루인데, 그 찰나의 감정은 여러 개다. 오늘은 괜히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잘못된 말을 꺼내지 않았는지 기억을 뒤적여 보다 옮기던 테이블에 손가락을 찧었다. ‘!’하고 짧고 욱신거리는 고통에 쏟아지던 잡념이 다 날아가 버린다. 이만하길 다행이군, 오른손이 아니라 젓가락질은 문제없겠어.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왁자지껄, 벌겋게 지던 태양에 익었는지 술에 익었는지 모를 그 속에서 평화로운 기도의 한 부분을 마친 느낌이다. 누군가의 속사정은 어떠할지언정, 다들 웃으며 헤어지는 것이 슬프기도 하면서 기쁘다. 사람 사는 것이 축제구나.

 

자리를 옮기며 복채로 받은 지폐 몇 장이 든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꼼지락꼼지락 움직여본다. 이 정도면 이번 달 전기세와 수도요금은 해결되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간단히 장을 봐도 되겠네. 아니지, 나는 이상하게 돈이 들어오면 분명히 쓸 일이 생긴단 말이야. 우선 이 돈은 비상금으로 둬야 하나. , 아까 시장에서 본 그 건, 살걸 그랬나. 몇 장의 지폐는 이것이 되었다 저것에 되었다 정신없었다.

 

그러던 중 몇몇은 먼저 집으로 가고, 몇몇은 다시 작은 카페에 모였다. 헤어짐이 아쉬워 차를 한잔 마신다. 그러다 옆에서 툭 하고 무엇인가 건넨다. 새가 앉아있는 은색 펜던트가 반짝이고 있었다.

받아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무심히 던져주는 이의 오늘 하루는 꽤 정신없었을 것이다. 고단함에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친 기색으로 목소리 끝이 갈라지지만 힘들었다는 말보다, 생각보다 다 잘된 것 같다고 말하며 홀가분하면서도 만족스러워했다. 설렘, 반짝이는 기쁨, 그 가운데 여유 한 가닥을 나에게 선물한 사람이 물었다.

 

오늘 괜찮지 않았어?”

 

최고였다고, 날도 좋고, 사람도 좋고, 다 잘 풀리는 하루였다고 답했다. 늘 이 사람의 오늘이 괜찮은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의 하늘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선 천기를 읽기 힘들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다 환한 가로등 아래, 현관 유리에 비친 나를 보고 잠시 놀랐다가 그 놀람이 우스워 픽 웃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1층 계단을 밝히는 불이 켜졌다. 별을 따다 내 집 문간에 심어놓고 괜히 투덜거렸네.

 

씻고 자리에 눕기 전 몇 장의 타로카드를 뒤적여 내일의 운세를 본다. 어제 뽑은 카드와 비슷한 모양새다.

 

꽤 괜찮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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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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