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영 작가의 소설 낭독회
김서연
준태는 여섯 시 십오 분에 종로에서 지하철을 탔다. 퇴근 시간이어서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출퇴근 시 메고 다니는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메고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고장 난 이어폰 대신 주문한 무선 이어폰은 내일이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늘 보던 동영상 대신 그는 포털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뉴스에서 구미가 당기는 걸 열어 보았고, 경제와 스포츠도 꼼꼼히 살폈다. 연예란으로 막 넘어갈 즈음 사람들이 지하철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신도림역이었다. 그의 앞을 파고들려던 여자는 그가 앞에 메고 있는 딱딱한 가죽 배낭을 보자 포기하고 그의 뒤에 섰다.
연예와 영화란을 거쳐 준태는 ‘우리동네’ 섹션으로 넘어갔다. 동네 소식과 동네 새 공간을 지나 동네 행사란에 초록 바탕에 하얀 글씨로 쓰인 작은 포스터가 그의 눈에 띄었다.
이보영 작가의 소설 낭독회
매주 화요일 : 오전 11시
매주 수요일 : 오후 7시 50분
회비 : 매회 5,000원
장소 : 갱지노트카페
(지하철 1호선 00역 북부 방향으로 내려오면 바로 보임)
이보영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의 이름이었다. 포스터를 눌러 보니 빨간 하트 표시의 ‘좋아요’가 열두 개, 댓글이 대여섯 개 달려 있었다.
-또 올게요, 감사합니다.
-뭔가 아늑한 느낌
-꿀잠...^^;;;
-좋아요좋아요좋아요
00역이라면 그가 늘 내리는 역보다 한 정거장 전이었다.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소설이라니. 그가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었던 게 언제였던지, 책은 어떤 것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협지는 진즉에 졸업했고, 인간시장을 재밌게 읽던 시절도 있었다. 시드니 셀던의 책도 많이 보았다. 해마다 설 연휴에는 꼭 삼국지를 다시 읽곤 했다.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 보여서 신기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언제부터 그런 것과 담을 쌓고 살았을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 음악회나 전시회는 물론이고 극장에도 거의 가지 않았다. 퇴근 후와 주말에 시간이 남아돌았지만 책을 읽을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준태는 갑자기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읽는 것도 아니고 듣는 건데, 오천 원 버리는 셈 치고 가볼까. 밖에서 슬쩍 분위기를 보고 아니면 말자는 생각을 하는데 마침 그 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역이었다. 북쪽 방향으로 내려와 두리번거리다가 딱 2초 만에 ‘늑대와 여우 컴퓨터’ 옆에 있는 그 카페를 찾았다. 엷은 미색 간판 한쪽에 진한 베이지색으로 ‘갱지노트카페’라는 이름이 명조체로 쓰여 있었다. 카페 전면의 위쪽 반은 투명유리, 아래쪽 반은 작은 갈색 격자 나무틀 안에 간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카페 옆으로 이삭토스트와 김밥천국이 이어졌다. 시간 여유가 있었고,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삭토스트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음식 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벽을 보고 이어진 좁은 테이블에 앉아 설탕이 뿌려진 토스트를 먹었다. 따끈하고 부드럽고 달콤해서 그동안 왜 이 맛있는 걸 안 먹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토스트를 다 먹은 후 준태는 휴대폰 카메라로 얼굴을 확인했다. 요즘 들어 자꾸 뭘 묻히고 먹었다. 다행히 입 주변은 깨끗했다. 옷의 앞자락에 설탕이 좀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슬쩍 눈길을 준 카페 안에는 이미 예닐곱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잠깐 주저하다가 그와 비슷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입장료를 내자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었다. 그는 여차하면 슬그머니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들은 준태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나 되었다. 이후에도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몇 명 더 들어와 빈자리를 채웠다.
일곱 시 오십 분이 되자 카운터 뒤쪽의 커튼을 열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두루뭉술한 중년 여자가 걸어 나왔다.
‘아니, 이보영이라면서요.’ 준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배우 이보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희, 영미, 미경은 좀 그렇잖아요. 서준태 씨 오천 원 날리셨습니다’라는 말을 삼키며 그는 뜨거운 커피를 홀짝 들이마셨다.
“소설가 이보영입니다.”
기어들어 갈 듯 작은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한 꽃무늬 여자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책이 아닌 A4용지를 꺼냈다. 인쇄된 걸 보니 역시 책을 확대 복사한 것이 아니고 큰 글자로 타이핑한 것이었다. 설마 자기가 쓴 소설을 읽으려는 건 아니겠지. 누가 유명작가인지도 모르고 문학에 문외한이라는 것이 새삼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긴 유명작가가 왜 이런 동네 서점에 오겠는가. 조금이나마 그런 걸 기대한 게 바보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꽃무늬 여자는 다른 말은커녕 헛기침도 하지 않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저 멀리 골짜기마다 눈이 남아있는 산이 보일 뿐 주변은 이제 막 푸성귀의 싹이 나기 시작한 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목가적이네. 그런데, 들어도 들어도 마냥 목가적이기만 할 뿐 도무지 사건이 될 만한 게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이 돌아다니고, 이웃이 돌아다니고, 개도 닭도, 마당엔 땅강아지도 돌아다녔다. 아니 어떤 목적이 있어서 돌아다녔다기보다 그냥 살았다. 누가 죽거나 다치거나 도망가지도 않았다. 뭔가 갈등이 일어나리라는 기대를 포기하자, 희미하게 남쪽 지방 억양이 묻어나고 묘하게 어눌한 작가의 말투가 심신의 긴장을 풀어주었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준태는 교복을 입은 채 정희, 영미, 미경 중 누군가와 손을 잡고 골목길을 걸었다. 가로등 불빛 속에 하얗게 떨어져 내리는 것이 눈송이인지 벚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가로등 밑을 지나 조금 어둑한 축대 밑에서 용기를 내어 여학생의 볼에 뽀뽀했다. 내친김에 키스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그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예서 뭐 하는 짓이여.”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담장 위에 머리가 벗어지고 늙어 쪼그라든 영감탱이의 얼굴이 삐죽 나와 있었다. 눈을 감고 잠이 든 준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장면에 그 여학생은 온데간데없었다. 날마다 자기 엄마의 콜드크림을 훔쳐 바르고 남동생의 얼굴에도 발라주어 반들반들 까무잡잡한 옆집 남매와 그가, 어렸을 때 놀던 뒷산으로 올라 가 떨어진 밤송이를 신발로 벌리고 밤을 주웠다. 어디선가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회색 자동차 안에는 그의 친구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현실에서는 세단 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없지만 꿈속에서는 그가 탈 자리도 넉넉히 남아있었다.
“야, 니들! 우리 다 모인 거 얼마 만이냐.”
그가 말하며 무심코 활짝 웃다가, 얼마 전에 장례를 치른 경호가 눈에 들어왔고 뭔가 애도를 해야 할 것 같아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준태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품을 하고 자기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려던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살며시 팔을 내렸다. 잠깐이었지만 이런 잠을 잔 게 얼마 만이던가. 요즘에는 지하철에서 어쩌다가 자리에 앉아도 온몸이 피곤하고 저릿저릿하기만 할 뿐 잠은 오지 않았다. 이보영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태는 깊게 숨을 내쉬고 그녀의 등을 향해 묵례한 다음 거리로 나왔다. 밖은 제법 쌀쌀했고 도로에는 갈색 메타세쿼이아 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어서 발밑이 폭신폭신했다. 조금 걸으니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그의 집까지 가는 버스는 8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정류장을 지나치며 준태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다음 주 수요일에도 준태는 이 길을 걸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화예술교육 > 십분발휘짧은소설 공모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회 수상작_개복치(김은성) (0) | 2021.10.22 |
---|---|
제5회 수상작_어느 배우(권순학) (0) | 2021.10.22 |
제5회 짧은소설 공모전 수상작품집(표지-최종) (2) | 2021.10.03 |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