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수상작_어느 배우(권순학)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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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배우

권순학


영화사 조명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 보면 반짝하고 사라진 수준이었지만 문십수라고 나이는 나랑 동갑이었던 배우의 마지막 영화를 우리 회사에서 제작했다. 이 흔치 않은 이름은 예명이 아닌 본명이었는데 부모가 결혼 10년 만에 낳은 자식이라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선하고 깔끔한 인상 덕분에 선역으로만 섭외되던 이 배우는 우리 회사에서 삼류 건달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회사까지 찾아와 주인공 배역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지금껏 선역만 연기하던 배우가 성공을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배신만 일삼다가 몰락하는 삼류 건달 역할을 맡겠다고 나서니 사장은 영 미심쩍다는 눈으로 십수를 보며 말했다.
“십수 씨가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건 알아. 그런데 그 좋은 이미지 가지고 악역을 맡겠다고? 이미지 타격이 장난 아닐 텐데? 십수 씨만큼이나 이미지 좋던 배우가 악역 한 번 맡았다고 동네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단골 식당에서의 대우가 박해진 건 물론이거니와 광고까지 뚝 끊겨서 곤란해진 적이 있어. 십수 씨 인지도에 고작 이 작품 하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쉬울 건 없잖아?”
“아뇨, 꼭 하고 싶습니다! 저한테 시간은 별로 남지 않았어요!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젊은 배우가 뜬금없이 시간이 없다느니,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느니 이해 못 할 소리를 하자 사장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십수를 바라봤다. 평소 부드러운 모습과는 달리 목소리까지 높이며 강경하게 요구하던 십수였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저, 저도 곧 서른이잖아요? 서른 되기 전에 기존의 연기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맡겨주시면 잘할 자신 있습니다.”
애초부터 십수를 영화 주인공으로 쓸 생각이 없던 사장이었지만 계속 자신을 찾아와서 요구하니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는 배역을 맡겼다. 선한 외모 덕분에 늘 선량한 배역만 연기하던 배우였던 탓에 비열한 건달 역할이 잘 어울릴까 감독과 스태프들은 물론 함께 작업하던 배우들 역시 크게 걱정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건달 역할을 잘 소화한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는 호평 일색이었다. 건달을 연기하는 동안 인상도 몰라보게 변했고 특히 모든 걸 다 잃고 폐인이 된 장면을 연기할 때는 피골이 상접해진 몰골로 촬영에 임한 덕분에 평소 십수를 인정하지 않던 선배 배우들도 진정으로 연기를 위해 혼신을 다 바치는 명배우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지금껏 선하고 곱상해 보이는 외모 하나만으로 배역을 따내기만 했다며 사람들 앞에서 십수를 무시하던 원로 배우 한 분은 자신의 분량을 모두 끝마친 뒤 촬영장을 떠나면서 먼저 악수를 요구하기까지 하셨다.
“이렇게까지 열정 넘치는 배우인 줄 모르고 자네를 무시해서 미안하네. 인제 보니 악당 연기서부터 환자 연기까지 무엇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잘하는군그려. 다음에도 같이 연기하세.”
자신을 칭찬하는 원로 배우의 손을 마주 잡으며 눈물까지 주룩주룩 흘리는 십수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슬슬 걱정됐지만 다른 스태프들은 그저 감격에 벅차 저러는 거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별 탈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촬영을 끝내나 싶었지만, 후반부에 들어서 십수가 지각을 밥 먹듯 하거나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고 간간이 촬영 중 넋을 놓거나 구석에서 조는 모습을 자꾸 보이면서 스태프들의 원성이 늘기 시작했다.
“집도 가깝다면서 왜 자꾸 늦는 거야? 예전에는 한 시간 먼저 일찍 와서 우릴 귀찮게 할 정도로 성실하지 않았나? 자기 인기 많다고 건방 떨지도 않고 인사도 잘해서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건달 연기한다고 정말 건달처럼 구는 건가? 아주 메소드 연기자 납셨네. 조만간 친구들 데려와서 촬영장 뒤엎거나 마약까지 하겠어?”
스태프들은 십수의 험담을 늘어놓기 바빴고, 배우들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불쾌해했다. 안 그래도 다들 자신을 향해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십수는 예정에도 없던 추가 장면을 요구면서 좋지 않던 분위기를 더 나빠지게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몰락해버린 주인공이 곁에 아무도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장면이었지만 십수의 건의로 배신한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화해하며 죽어가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주인공의 친구들이 영화에 아예 등장이 없던 건 아니고 아역 배우들이 연기했던 배역인데 결말 부분에 성인이 된 모습으로 등장시키자고 하니 뜬금없이 짝이 없었다. 감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십수는 친구 역할을 할 세 명의 배우를 불렀는데 경분호, 지발수, 우휘도라고 해서 자신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며 데뷔도 함께 했던 친구들이었다. 당연히 촬영장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고 스태프들은 십수의 험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자기가 뭐라도 돼? 제까짓 게 뭔데 정해진 대본을 고친다는 거야? 게다가 자기 멋대로 배우까지 캐스팅해? 진짜 건달 같은 놈일세.”
촬영장 분위기가 눈에 띄게 좋지 않은 와중에 십수가 불러온 배우들 역시 문제가 됐다. 분호야 지금껏 십수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작품에 조연으로 자주 출연한 탓에 별문제는 없었지만, 지발수와 우휘도이라는 배우가 가장 큰 문제였다. 발수는 평소 대본에 짜인 연기보다는 애드리브 연기를 고집하다가 스태프와 충돌이 잦아 사실상 퇴출당한 문제아였고 휘도는 형편없는 연기력 때문에 말없이 서 있는 배역을 맡다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이미 오래전에 은퇴해서 개인 사업 중인 전직 배우였다. 제멋대로 만든 장면에 배우들도 마음대로 섭외한 것에 단단히 화가 난 스태프들은 분호와는 사적으로 대화하지 않은 지 꽤 됐으며, 발수나 휘도와는 이미 오래전에 다투고 절교한 사이라는 십수의 고백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고는 촬영장에서 뛰쳐나간 음향팀장을 시작으로 다 포기하고 집으로 가겠다는 스태프들이 속출하자 사장이 직접 현장까지 오더니, 무릎까지 꿇고 빌며 진정시킨 덕분에 촬영이 재개됐지만, 분위기는 언제 또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직접 촬영장까지 찾아와서 스태프들을 격려하고 챙겨준 덕분에 존경받던 사장이었지만 십수를 편들면서 무릎까지 꿇은 일 때문에 덩달아 평판이 깎여나갔다. 분위기가 흉흉한 와중에 십수가 친구 역할로 지목한 배우들이 촬영장에 도착했는데 하나같이 표정은 좋지 않아보였다. 먼저 도착한 분호와 휘도의 태도는 반갑게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십수가 무안함을 느낄 정도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에는 먼저 연락해도 바쁘다고 안 받더니 필요하니까 먼저 연락하는 인성 좀 봐. 그렇게 살면 못 써.”
“네가 하도 연락해대서 가게 문 닫고 왔다. 오늘 장사 못해서 본 손해만큼 보상해줘야겠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신인 시절에 함께 활동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십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며 서로 마주 보려고도 하지 않는 분호와 휘도의 모습에 오히려 보고 있던 내가 더 민망하고 불편할 정도였지만 발수에 비하면 약과였다. 한참이나 늦게 도착한 발수는 잔뜩 성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스태프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이 문십수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그날도 어김없이 지각한 십수와 드디어 얼굴을 마주하게 된 발수는 대뜸 멱살부터 잡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어렸을 때부터 나한테 도움 많이 받아서 언제나 내 편이 되겠다더니 내가 감독한테 찍혔을 때는 내 편 안 들고 감독 편들었지? 이 배신자야, 네 덕분에 난 배역까지 강판당하고 다시는 영화도 못 찍고 공사장이나 전전하게 됐어. 그동안 한 번이라도 날 찾지 않더니 뭐? 내가 필요해? 나라면 와주리라 믿는다고? 이런 양심도 없고 뻔뻔한 양아치 같은 놈을 봤나! 널 믿다가 망해버린 내 인생, 어떻게 책임질 건데?”
한 손으로 멱살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꽉 쥔 발수를 보니 금방이라도 십수를 때릴 기세였지만 촬영장의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때려주길 기대하는 눈빛들이었다. 다들 십수의 행패에 단단히 질려 정나미가 떨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스태프들의 기대와는 달리 발수는 멱살을 놓더니 십수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내가 돈만 궁하지만 않았어도 여기 올 일은 없었어. 우휘도나 경분호 저것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너랑 화해할 생각 없으니까 친한 척할 생각하지 마. 너랑 연기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 거다. 어서 대본이나 내놔.”
“따로 대본은 없어. 너 대본 없이 연기하는 거 좋아하잖아?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우리 넷이서 대본 없이 영화 한번 찍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감독님이랑 대표님 졸라서 겨우 얻은 기회야. 너 말고 다른 애들도 내가 사정사정해가면서 불러냈고. 분량은 10분 정도밖에 안 되지만 무덤까지 가져갈 추억거리로는 충분할 거야. 협조해줄 거지?”
“뭐? 내가 대본 없이 연기한다고 할 때 가장 정색하던 게 너잖아? 그래서 내가 감독이랑 싸울 때도 네가 내 편 안 들고 감독 편든 거잖아? 나한테는 대본이 중요하다면서 상의도 되지 않은 애드리브 치다간 같이 일할 수 없게 될 거라고 하더니만 인제 와서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왜 지금까지 안 하던 짓을 하는 건데? 너 혹시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거냐? 곧 죽기라도 해?”
싸늘한 눈빛으로 십수를 노려보며 잔뜩 비꼬던 발수였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발견하고는 안색이 변했다. 사실, 그때 당시의 십수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상이었던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초췌한 몰골이었다. 저 퀭한 두 눈빛은 어디 한 곳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흔들렸고 살집 없이 앙상한 몸은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게 당장 촬영 끝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부고 소식이 뜬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발수는 십수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이 지나 기다림에 지친 스태프들이 자리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거나 짐을 싸 들고 나가려는 찰나,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발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촬영 시작을 독촉했다. 누구 때문에 마지막 촬영이 늦어진 건데 오히려 큰소리치는 저 뻔뻔한 모습에 상실한 스태프들은 한 소리 하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가 발수와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다른 두 친구에게 다가간 발수는 진정하지 못하고 울먹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휘도랑 분호, 너희도 지금 바로 연기 준비해! 십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을 거 아니야?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야! 저놈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추억 하나 만들어주자고!”
어리둥절 해하던 두 친구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강 짐작했는지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배우들은 물론 나를 비롯한 스태프들까지 각자 도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성공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일삼다가 끝내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하고 낡은 반지하에서 죽게 된 건달은 오래전에 갈라섰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화해하게 된 친구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 눈을 감았다. 주연 배우의 요구로 갑작스럽게 급조되어 대본 하나 준비되지 않은 장면이었지만 배우들은 저마다의 진심을 담아 10분 분량의 장면을 뽑아냈다. 십수에게 실망해서 험담을 늘어놓기 바쁘던 스태프들은 촬영이 끝나자 눈물을 흘리며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감독이 컷을 외치고 카메라가 꺼졌지만, 친구들은 십수를 끌어안고 울며 놔주질 않았다. 모든 기력을 다 쏟아냈는지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어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십수는 생기가 없다 못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이었지만 진심으로 행복하고 미련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촬영이 끝나고 1주 뒤, 십수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잠을 자듯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는데 유작이 된 작품을 함께 연기하며 우정을 되찾은 친구들이 곁을 지켰다고 한다.
“우리가 그 젊은 배우에게 마지막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한 거나 마찬가지야. 다들 중환자 데리고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어.”
뒤늦게 사장이 밝히길, 이미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십수는 이 작품을 자신의 유작으로 생각하고는 자신이 주연을 맡겠다고 나섰다는 것이다. 예정에는 없던 마지막 장면을 건의한 이유도 한때는 절친했지만, 점차 소원해진 친구들과 묵은 감정도 풀고 함께 자신의 마지막 연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촬영한 시간은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십수에게는 더없이 값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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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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