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할까도 생각했다. 열심히 해도 노래가 늘지 않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방향을 제시해주는 선배도 별로 없었다. 성악을 계속해도 될까?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한계를 뛰어넘는 마음으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요리사가 되자.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그는 하루종일 노래 연습을 했다. ‘요만큼’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하고, 또 했다. 부르고 또 불렀다. 점점 음악이 좋아졌다. 이전에도 그랬겠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단단한 벽을 뚫은 기분이었다. 바로 이거였고, 역시 성악이었고, 그렇다면 해야 했다. 그래, 이 길이었다.
글쓰는 성악가
벌써 2년 전, 그는 『내가 선물입니다』라는 책을 냈다. 이백 자 원고지 5매 내외의 짧은 글 여든네 편이 실려 있다. 읽어보니 재미있었고, 푹 빠져들었다. 공연 에피소드가 많았는데 ‘무대 위’의 모습만 그리는 게 아니라 ‘아래’와 ‘너머’, ‘뒤편’의 이야기를 잔뜩 실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지방 공연 중에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그를 향해 연거푸 “나가!”라고 외친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하고, 별일을 다 겪는구나 싶다. 무대에서 내려오니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 사람을 찾아가서 담판을 지을까? 극장 관계자에게 항의할까? 기획사 대표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할까? 그런들 공연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조용히 서울로 돌아오고 만다. 그날 밤, 여기저기서 미안하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혼자 가라앉히길 잘했다 싶고, 스르르 마음이 풀린다.
그 관객은 그에게만 그런 언행을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분명 지독한 화살을 맞았지만 주변 사람들을 배려했다. 수많은 관객과 공연 관계자 들. 그들은 ‘함석헌’을 거기 있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 일을 통해 그는 모든 이에게 언제 어디서나 예쁨 받을 수 없지만 자신이 많은 이들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책의 출발, 글의 시작을 더듬으면 ‘극동방송’이 있다. 몇 해 전 그곳에서 3년간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다. 방송은 1인 시스템이었고, 그는 작가도 되고 PD도 돼야 했다. 매일 글을 쓰던 게 습관이 돼서 방송을 그만둔 뒤에도(당시 반응도 좋았고, 추억도 많아서 기회가 되면 다시 하고 싶다) 일이 생길 때마다 기록으로 남겼다. 글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닌가? 내가 왜 이러지? 그 무렵 우연히 모 작가를 만났고, 그분이 출간을 권했다. 당신의 시선이 바로 작가적 시점이에요, 라면서.
“늘 고민하고, 글로 남기고, 어떤 일이 생기면 공부하는 게 몸에 뱄어요. think와 thank는 어원이 같대요. 생각을 많이 하려고 해요. 내가 왜 노래를 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지……. 그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만들죠.
외국 성악가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떻게 살았다는 정보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그런 게 별로 없어요. 젊은 성악가들의 롤모델이 되고 싶어요. 국립오페라단에서 활동할 때는 그때가 전성기라고 믿었어요. 그 이상은 없을 거라고 단정했죠. 살아 보니 아니에요. 정정당당하게(?) 뽑혀서 10년 넘게 계양구청 예술감독도 하고, 자랑 같지만 코로나 시국에도 꾸준히 공연했어요. 제가 올해 51세인데, 저만의 마라톤을 하면서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성악가 가수로서 60세까지 무대에 서는 게 목표입니다. ”
소통하는 성악가
<나는 고양이를 샀다네(이하 고양이)>로 스타가 됐다. 스타……까지는 아니지만 꽤 주목받았다. 2013년 KBS <클래식 오디세이>에서 섭외가 들어와 오페라 아리아, 가곡, 영화 음악 등을 녹음했다. 그중에 ‘고양이’도 있었다. 미국 작곡가 아론 코프랜드가 만든 민요인데, 여섯 마리 동물 울음소리를 순서대로 내야 했다. 문제는 동물 소리가 ‘미국 것’이라는 데 있었다. 한국 닭은 ‘꼬끼오 꼬꼬꼬꼬꼬’ 목청 높이는데 미국 닭은 ‘꾸꾸둘둘둘둘’ 하고 울었다. 말은 ‘히잉히잉’이 아니라 ‘지미작지미작’이었다. 흐음.
그는 ‘우리 식’으로 노래를 바꿨다. 간단한 몸동작을 섞어 힘차게, 유머스럽게, 멋지게 불렀다. 나는 이런 가곡을 부를 거야,가 아니라 망가져도 좋으니 듣는 사람이 즐기길 바랐다……고 생각한 건 나중이고, 사실 처음에는 부끄러웠다. 유치한 곡으로 알려지는 게 싫었다. 하지만 수많은 무대에서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모두에게 감동을 주고 환호받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관객들이 좋으면 그도 좋았다.
‘중견 성악가’, ‘국립오페라단 출신 성악가’라는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눈빛을 보면 안다. 표정을 보면 안다. 박수 소리를 들으면 안다. 함께 공감할 때 공연자도, 관객도 행복하다. <사랑의 묘약>의 약장수 역을 맡았을 때도 원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뒤 ‘요즘 언어’를 새로 넣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좋지만 관객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전에는 연주자가 연주만 잘하면 됐다. 십 년 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고, 연주가 반, 소통이 반인 것 같았다. 그러던 마음이 구체화 돼 최근에는 ‘연주+소통+존경’이 ‘33%+33%+33%’라고 여긴다. 관객들에 대한 존경이 귀한 자질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머지는 1%는 물론 사랑.
“소프라노는 아름답고, 테너는 매력이 있지요. 메조소프라노는 우아하고 바리톤은 멋집니다. 알토는 따듯하고요.” 그럼 베이스는? 무게감이 있어야 하나? 다른 파트와 조화롭게 부르는 게 좋을까? 그는 그만의 길을 택했고, 그건 행복이었다. ‘베이스는 행복하게’. 대개 베이스는 신부, 제사장, 왕, 수도승, 살인자 역이 많다. 소프라노와 손잡고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이스는 안 하는 건데……(농담이다).
‘고양이’ 외에 요즘은 ‘마라톤’을 앵콜곡으로 많이 쓴다. 2020년 KBS 창작동요제 대상곡인데 긍정과 희망이 넘치는 가사와 멜로디가 정겹다. 올봄, 현음 중창단과 함께 한 어린이날 축하 무대에서는 마라톤 복장을 하고 뛰기도 하면서(?) 근사하게 소화했다.
선물하는 성악가
베이스 함석헌은 오는 11월 17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커피콘서트의 주인공이다. 공연 테마는 선물.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한 <조그만 시작> 앨범에 수록된 곡과 그동안 꾸준히 사랑받은 곡들을 선보인다. 노래하고, 토크하고, 춤추고, 약도 판다.
영화 <노팅힐>의 주제곡 ‘She’를 부르면서 장미꽃을 나눠주거나 객석에 내려가 ‘박카스’를 건네는 이벤트를 좋아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도 있었는데 공연 횟수가 늘면서 관객들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꽃만 줬는데 차츰 약도 주고…… 돈 조반니를 꾀는 장면에서는 초코파이와 새우깡을 준비해 뿌리기도 하고……
가곡만 부르라고 하면 그게 가장 쉬울 수 있다. 노래하고, 선물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정통(?)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그를 괴짜라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거 질투 아닌가. 노래가 다가 아니라니까. 해보면 안다. 무대에서 내려와 약 파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따금 민원도 들어온다. 왜 나한테는 초코파이 안 줍니까? 노래 부르랴, 반주 들으랴, 오케스트라 신경 쓰랴, 거기다 조금 긴장하니까 가끔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을 때도 있다. 어려우니까 하는 거다.
예전에는 늙은이 역할을 자주 맡아 늙은이 소리를 내려고 늙은이처럼 했는데 이제는 늙은이처럼 안 해도 된다. ‘내 소리’를 제대로 내도 된다. 그러다 보니 소리도 더 젊어지는 것 같다.
“40대 초반에는 좀 우울했어요. 30대가 끝나서. 이제 다시 전성기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노래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30대 때처럼 못 부를 것 같아서. 40대 중반 어느 날 무대에서 노래하는데 내 노래가 너무 좋은 거예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중후함, 깊은 맛. 아, 이건 제가 몰랐던 거더라고요. 50대가 되면 더 좋아지겠네, 점점 좋아지겠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삶이 나를 지치게 하고 속인다고 분노한 적도 있지만 버티고 버틴 만큼, 힘든 걸 이겨낸 만큼, 고통을 넘어선 만큼 또 다른 내가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해요. 잘 기다려보자. 잘 버텨보자. 당신이, 내가 선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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