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짧은소설 공모전 당선작) 마음의 색조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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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색조

신보람


—더는 곤란합니다.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곤란합니다.

남자도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의사가 기록을 확인하며 말했다.

—하지만 벌써 여러 차례 시술받지 않으셨습니까. 오전에도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사유를 들어, 저조한 기분으로 인한 잿빛 피부를 말끔한 순백색으로 바꾸셨지요.

—정말 중요한 회의였으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지나치게 자주 인위적으로 몸의 색을 변화시켰다간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경우에 따라서는 불치의 피부암까지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거듭 권고 드립니다만, 피부 빛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달라지도록 가만히 두셔야 합니다. 기쁠 때는—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햇살이 스며들어 눈부시게 부풀어 오르는 구름 빛으로, 즐거울 때는 바람이 흐드러지는 초록빛으로, 화가 날 때는 폭풍우 치듯 충혈된 암적색으로, 나른할 때는 어렴풋이 일렁이는 노을과 억새 빛 너머 소복이 쌓여가는 금귤 빛으로, 피곤할 때는 거뭇거뭇 갈라지는 담갈색으로, 우울할 때는 먹먹하고 그늘진 청회색으로, 절망감이 엄습할 때는 혼탁하고 꽉 막힌 암막의 검은색 그대로 내버려 두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의사가 남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가볍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경고 드리지만 시험 때마다, 면접 때마다, 이런저런 회의에다 사사로운 친목 모임 같은 곳에 참석할 때마다, 심지어 기분전환 삼아 여가를 즐기거나 껄끄럽고 서먹한 사람과 차를 마실 때까지, 소소한 순간순간 피부색을 관리하려 들다간 조만간 후회를, 신경 체계가 교란되어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평생 우중충한 담즙 색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 정도는 가벼운 부작용입니다.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머리 색을 치장하는 것쯤으로 여겨서는 정말이지 곤란합니다! 그런 이유로—정확한 용법을 지키지 않고—정해진 기간 안에 일정 횟수 이상 환자의 몸에 색소를 투약하면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잘 아시겠지요. 어련히 잘 아시겠습니까. 그런 법쯤 어겨도 약소한 벌금형이나 가볍디가벼운 처벌에 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거리낌 없이 진료실을 흡연실 들락거리듯 하시겠지요.

—그렇지만 선생님,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최근 들어 환자분께서 투여받은 색소만 해도 활력이 샘솟는 적도의 주홍빛부터 영감이 반짝이는 열대의 산호바다 빛, 고상하고 다사로운 담수 진줏빛, 무늬가 돋보이는 칠보 자개 빛, 금박이 묻어나는 군청색, 쪽빛을 휘감은 상아색, 근심을 가려주는 청록색, 근육이 두드러져 보이는 금강석의 색, 협박에 어울리는 쐐기벌레 색, 비칠 듯 말 듯한 청보라색, 소용돌이치듯 진하게 우러나는 감람색, 철저한 인상을 풍기는 금속성의 푸르스름한 회백색, 묵직하고 그윽한 오스트리아산(産) 흑단색까지……. 특히 열감이 번져 드는 분홍색을 몇 번이나 처방해드렸는지 아십니까?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부 그럴 만한…….

—혈관으로 주입하는 색소뿐 아니라 복용하는 알약까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알약은 효과도 더디게 나타나고 지속시간도 짧더군요.

—그래서 과다복용하셨습니까? 한꺼번에 수십 알을? 데친 문어처럼 뜨끈뜨끈한 붉은 색깔로 기어들어 오셨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십니까? 솔직히 말씀해보십시오, 간호사에게 저 말고 월급 비슷한 걸 주면서 알약을 받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선생께서 방문하실 때마다 저를 대하는 간호사의 태도와 피부색이 전과 달리 느슨히 고용된 관계를 암시하듯 모호한 회색빛으로 흐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순전히 기분 탓일까요?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분명 다른 병원도 은밀히 방문하시겠지요? 예의 분홍빛 색소를 처방받으러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럴 수가 없어요. 다른 곳을 찾아간 적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색을 제대로 섞지 못하더군요.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제가 원하는 싱그럽고 달뜬, 진피로 깊이 번져 들수록 향긋한 즙이 흘러들 듯 진하고 발그레하게 물드는 분홍색이 아니라 샐쭉한 살구색이나 설익은 자두색, 비계가 섞인 듯한 잇몸 색, 촌스럽고 인공적인 데다 수상쩍고 끈적거리면서 겉돌기만 하는 쿰쿰하고 부루퉁한 색깔 정도밖에—오래된 약을 쓴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이곳처럼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색감은 표현하지 못하더란 말씀입니다. 새삼스럽지만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이 분야 최고의 전문의입니다. 예술가이시지요……! 그런 이유로 선생님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자칫했다간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까요.

—어째서 특정한 색소를 줄기차게 원하시는지 짐작은 갑니다.

의사는 안경을 벗은 후 눈가를 문질렀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닙니까?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연인에게 마음이 식었다는 걸……!

—꼭 그렇지는……. 그렇지만……. 어쩌면…….

—몸이 분홍빛을 띠지 않으면 눈치를 채기 때문일 겁니다.

여전히 남자를 주시하며 의사가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마음이 식자 색이 빠지기 시작해서, 그녀를 만날 때도 희멀건 냉장 음료 같은 색상을 띠더군요. 그렇다고 싫어진 것까진 아니어서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지금 헤어지면 그녀도 상처를 받을 겁니다. 저를 무척 사랑하거든요! 갑작스러운 이별에 그녀의 몸이 축축한 보랏빛으로 흠뻑 물들 거라 상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미어집니다……. 혹 선생님은 그런 적 없으십니까? 선의의 감정으로 여인을 속인 적 없으신가요? 제 생각에는 선생님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안경을 고쳐 쓰고 물었다.

—여러 달 전부터 선생은 이미 몸의 색상을 회복했습니다. 이미 근사한 분홍빛을 띠고 계신단 말입니다. 보다시피 지금도 여전히……, 만나지 않을 때조차 색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분에게 푹 빠진 듯한데, 모르셨습니까……? 혹시 모르고 계셨다면 안과 전문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또한 지나친 시술의 부작용일지도 모르니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신의 체색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면 심각한…….
                                     
의사는 책상을 짚으며 남자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제 몸이 분홍색인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옷으로 가려진 부분까지 속속들이 화사한, 희색이 넘치는, 불꽃이 반짝반짝 살갗을 휘감고 신이 나서 황금빛 연기를 피우며 타오르는 분홍색이지요! 그렇지만 이 색은……, 그런 분홍색이 아닙니다. 뭐랄까……, 분홍색이지만 예전 분홍색과는 다른……. 사실 그전 것은 어딘가 칙칙한 감이 있었던 반면…….

—아하 알겠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또 다른 분홍색이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처럼 탁월한 전문가조차 얼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묘한 색상 차이를, 여자들은 알아차리지요. 여자들은 온몸에 감도는 이 홍조가 자신의 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단 말입니다.

의사는 남자의 피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목숨을 걸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일로 목숨을 거는 것이야말로 저와 같은 남자의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럴 수가 없소.

의사가 말했다.

—나 또한 의사의 소명이 걸린 일이란 말이오.

남자는 웃었다.

남자는 그러나 조용히 웃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선생님의 몸빛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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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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