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싫다는 새파란 거짓말-7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 거리에서

페르게 유적지 찾아가는 길에 학교가 보인다. 아니, 땅을 밟고 뛰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날은 2월 3일.

“오늘 개학했을 거예요.”
“유럽 다른 나라들처럼 터키도 우리나라랑 학기가 달라요. 겨울방학이 3준가, 아무튼 되게 짧고 여름에 길게 쉬어요. 7, 8월은 거의 논다고 보시면 돼요. 터키 사람들한테 여름은 특별해요. 여름에 한번 인생이 멈추는 거에요.”

인생이 멈춘다는 말.
내 인생의 멈춤은 겨울, 지금.


*** 버스에서

우리나라 버스나 마을버스처럼 운행되는 교통수단 이름은 돌무쉬. 하얀색 봉고인데 좌석이 20개쯤 될까. 돌무쉬라 부르지만 차종은 지역마다 다를 것이다. 따로 정류장도 있긴 하지만 사람이 서서 손짓하면 멈추고 태워준다.

차비는 손님들이 알아서 운전사에게 건네는데 만석일 경우 운전사 가까이에 있는 손님이 돈을 전달해주는 것 같았다. 필리핀의 지프니 같은 걸까. 예배의자처럼 긴 좌석에 마주보고 앉아 사람이 탈 때마다 엉덩이를 붙이며 자리를 만들었던 기억. 외국인인 내가 왼쪽 사람에게 돈을 받아 오른쪽 사람에게 건네주면서 현지인과 접촉했던 때가 생각난다. 생활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고, 더불어 사는 느낌이었지.

시데 유적지에서 근거리를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탔다. 나는 운전사 뒷좌석에 앉았다. 한 여자가 타더니 기사와 대화를 나눈다. 검은색 히잡을 쓴 여자가 웃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움푹 패이는 보조개가 매우 사랑스러웠다. 저런 얼굴로 대화할 정도면 분명히 아는 사이일 거야. 다정한 이웃일 거야. 굳게 닫고 있던 입가의 근육이 말랑말랑해지면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내 얘기다. 그들이 따뜻해 보였던 것이다. 동네 사람인데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하나 보다. 그렇게 짐작했다. 보기 좋았다.

-아는 사이인가 봐요.

마침 길잡이가 하나 건너 의자에 앉아있어서 말을 걸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여자가 타면서 나 어디까지 가는데 타도 되냐고 하니까 기사가 괜찮다고 하면서 이제 일이 끝난 거냐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좀전에 마치고 집에 간다고 하면서 웃은 거예요.

-처음 본 사람과 어쩜 저렇게 다정하게 얘기하죠?

-저도 처음엔 놀랐어요. 터키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말도 잘 걸고, 잘 웃고, 대화도 잘 해요. 궁금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럼 너네는 새로운 사람을 어떻게 만나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다음 말이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하잖아요.

동의했다. 의심없이.

길잡이는 오지랖 아닌가 싶을만큼 택시기사나 버스 옆자리에 앉은 승객 들과 이야기를 잘한다. “제가 다녀본 나라 중에서 터키 사람들이 가장 친절해요.”

우리나라는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경계하고 의심하지 않나? 얼른 길을 물어보고 싶다가도 핸드폰 지도 앱으로 가면 되잖아, 너 바보냐, 미개인 쳐다보듯 하는 시선 때문에 망설여져 입을 다물고 말지 않나?

한번은 시외버스를 탔고, 소도시에서 승객 몇 명이 내렸다. 짧은 틈에 말린 무화과를 파는 행상이 탔고 몇몇이 구입했는데 길잡이도 500그램 한 박스를 사더라. 팀원들에게 듬뿍듬뿍 나눠주더니 젊은 버스 차장에게도 주고 운전기사에게도 건네고.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안 하겠지만 어쨌든 마음을 받아주니 이쪽에서도 정을 나누는 걸 테지. 젊은 차장이 인쇄된 종이에 볼펜으로 체크하면서 승객의 이름과 목적지를 확인하는데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 웃어주더라. 놀라웠다. 눈앞의 현실이 다시 볼 수 없는 신기루 같아서 조금 슬펐다.



*** 정류장에서

시데Side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우리 팀원들의 대화.

-이 여행사의 특징은 연세 드신 분이 많다는 거예요. 패키지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잖아요. 여기는 길게 하는 프로그램이 많고 길게 여행 올 수 있는 사람은 돈 많고 시간 많은 어르신들밖에 없잖아요. 지난번 중동 팀도 23명이었는데 다 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젤 젊은 사람이 73년생.

-여기 오기 전에 후기 좀 찾아보려고 했는데 진짜 없더라고요.
-이 여행사가 그래요. 사람들이 후기를 별로 안 남겨요.
-나는 돌아가면 후기 남길 거예요.
-쓰세요. 사실 이런 이야기 잘 안 하는데 써주시면 좋죠. 여행사에서 상품권도 줄 걸요.
-나이 든 사람들은 후기 안 쓰지. 그날그날 여행하면 그걸로 땡이야.


돈 많고 시간 많은 나이 든 여행자라...
우리 엄마는 블로그도 하고 여행일기도 쓰는데...
나도 매일 블로그를 올리고 있는데...(그들은 모른다)
나이 들어서도 책 읽고 열심히 기록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장기로 배낭여행 할 때는 무거워도 책을 서너 권은 들고 다녔는데 지난번 스페인 여행
때도 이번에도 캐리어 안에 달랑 한 권 넣어 왔다. 그때도 그랬지만 팀원 중 누군가가 종이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직까진 그렇다)



*** 버스에서

<심심해서 적어본 내가 간 나라들>

일본. 인도. 네팔. 중국. 티베트
대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프랑스(파리).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네덜란드(암스테르담)
필리핀. 홍콩. 인도네시아(발리). 터키. 그리스



*** 버스에서

“뒤에 중국인이 앉아 있으니 다른 데 가서 앉겠다”

“야, 중국인 탄다. 짜증 나.”

터키 말을 다 알아듣는 길잡이.
그동안은 모른 척 하다가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우리 한국사람이야.


오늘 아침 호텔 레스토랑에는 정말로 중국 여행객이
잔뜩 있었고, 한 커플이 문을 열었다가 오른쪽 팔뚝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로 나갔다고 한다.(룸메의 목격담)



*** 로비에서

파묵칼레는 석회층과 온천에 발 담그기가 여행 하이라이트지만 오후 5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우리에게는 반나절이 더 남았다. 길잡이는 호텔 직원에게 물어 가볼 만한 곳 정보를 입수한다. 원하시면 택시를 불러준단다. 나를 제외한 넷은 관광 오케이. 교회터와 동굴을 보고 날씨 운이 좋으면 케이블카도 탈 수 있다. 그들만 보낼 수 없었던 길잡이가 동행하고 호텔에는
나만 남았다. 10시쯤 그들이 떠나고 방에 남은 나는 유튜브로 음악을 듣고, dslr로 찍은 사진을 노트북에 옮겨 놓고, 여행사에서 나눠준 책자를 보고 블로그 내용을 보충한다. 사과도 한 알 먹고 차도 한 잔 마신다. 11:50 체크아웃 후에는 점심도 굶고 로비에서 책을 읽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자주 그런 시간을 원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을 이해한다면 사랑해도 떨어져 있고 싶다는 마음도 짐작 가능할 것이다. 거리를 두고 기다려 봐야 누군가를 새롭게 좋아할 수 있다. 시간을 주고 멀어져 봐야 상대가 지겨워지지 않는다.

함께 입구를 통과했지만 나란히 걷는 것도 잠시, 폐허도시에서 나는 금세 혼자가 되었다. 남들보다 앞서 옆길로 샜다. 적막 속에서 홀로 감탄하고 고요 속에서 셔터로 감탄을 붙잡는다. 핸드폰을 기댈 수 있는 돌을 찾아 10초 버튼을 눌러놓고 셀카를 찍는다. 다시 일행과 만났을 때 “사진 찍는다고 혼자 돌아다녔구나.” 누군가 말한다. 성정을 들키지 않고 카메라로 핑계 댈 수 있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사물 하나로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침묵이 있어야 다시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움이 있어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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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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