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시
<손톱>_권여선
장-마음이 아팠다.
김-이렇게 사는 청년들이 많다. 독립책방에 가면 청년들이 쓴 에세이 중 옥탑방, 지하, 고시원 생활을 다룬 걸 흔히 볼 수 있다. 공시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 쓴 것도 많고.
나는 돈 계산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요새 젊은 애들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경제관념 있는 친구들이 많다. 철저하게 계산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지루했다.
효-현실이 이보다 더 절박할 수 있을 것 같다.
장-마지막 부분, 할머니와 소희의 관계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꼭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따듯한 그림인 건 맞다.
김-테두리의 확장인 것 같다. 관계 확장의 소망을 담고 있다.
장-민경은 엄마와 상의하지만 소희는 상의할 사람이 없다. 형편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로 이 소설을 볼 수도 있다. 상의할 수 있는 관계는 동등한 위치라는 것이고 의지할 만한 대상이 있다는 것이고 비빌 언덕이 있다는 거다.
효-사실은 숫자만이 희망이다. 희망을 갖기 위해 소희는 끈을 붙잡고 있다고 느껴진다. 할머니와 소희를 가족으로 연결하면 상투적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마지막 문장에 “소희는 가만히 앉아 있다. 어디서 내릴지 어느 역에서 내릴지 소희는 알지 못한다.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모른다. 밖은 어두워지고 휴일이 지나가는데 소희는 조금만, 조금만, 하며 앉아 있다”는 말이 나온다. 소희는 유예시키면서 앉아 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게 다행이다.
효-‘슬프면서도 좋은 거’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생각났다.
나-이 소설에서 숫자는 돈을 나타내는 데 집중적으로 쓰였지만 나이와 집-회사와의 거리 시간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숫자로 소설의 디테일을 살리고 분위기를 계산적으로 만들었다. 계산적으로 끝까지 밀어붙여서 읽는 이를 질리게 만든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돈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리고 부끄러워한다. 가난보다 자유를 외쳐야만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가난에 대한 이야기는 뉴스에서 접하는 안타까운 비보로만 여겨진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가난한 자가 존재하고 어쩌면 복지 사각지대 속에서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숫자 외에 본희의 편지나 ‘슬프면서 좋은 것’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소희의 성격도 이 소설을 구체화의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는 요소들이다.
<문상>_권여선
고-이 소설은 <분홍 리본의 시절>에 실렸는데(약 10년 전) 그때는 문상처럼 시니컬하고 위악적인 인간탐구소설을 많이 쓴 것 같다. 요새는 흔한 캐릭터인데 당시에는 소설가들이 이런 캐릭터를 많이 그렸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인물 같기도 하고.
장-별로였다.
효-미투로 치닫을 여지가 있는 소설이다. 나는 재미있게 봤다. 권력관계에 대한 뉘앙스도 있었고.
이-권여선 작가 소설 두 개 다 도입부에 좀 무리가 있다. 훅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뭔가 암시가 있어야 하지 않나?
효-공지영 작가의 경우 뭔가에 의지해서 쓴다는 느낌이 있는데 권여선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작가는 ‘여류 소설가/여류 시인’ 같은 말이 어울린다. 나는 그냥 소설가/시인을 좋아하는데 권여선은 후자인 것 같다.
나-어떨 때 ‘여류’가 붙는다는 거죠?
효-운동권 소설로 치면 주체가 아닌 뒷바라지하는 객체 같은... 치열함이 없고 주변적인 존재로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여류라는 느낌이 든다.
고-공지영은 소설 속에서 미남미녀를 그리는 느낌이다. TV드라마적인 요소가 있다. 반면 권여선은 삶, 변두리를 그린다. ‘소설은 이런 것’의 본질에 가까운 글을 쓰는 것 같다. 진지함이 느껴진다.
계간지에서 여자후배와 선배 사이를 다룬 김미월의 소설을 읽었는데 이 소설과 느낌이 비슷하다. 다음에 복사해서 가져오겠다.
나-이번 달에는 구체화를 통해 작품의 맛을 살린 소설을 주로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은 여자의 말투 ‘어디서 배웠어요?’가 압권이다. 여자는 그 말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캐릭터는 물론 남자와의 관계를 붙잡고 있다. 그들의 섹스는 만족스럽지 않았고 남자는 여자에게 끌리는 것도 같다가 아닌 것도 같다. 여자가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을 때는 역겨워하고, 여자의 음모를 꽃처럼 만들어 건넸을 때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3년만에 전화해서 친척의 부음을 전하는 여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 사이에 그날 밤, 그 멘트가 없었다면 관계가 가능했을까? 남자는 어디서 배웠느냐는 여자의 말 때문에 그녀를 잊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상을 갈지 말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그 말투가 매력적으로 쓰였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효-일상의 파격, 자기 거울, 글쓰는 자의 허위의식이 드러난 소설 같다.
고-남자는 문상을 갈 것 같다.
효-나도 간다는 데 한 표다.
4차시
<소녀와 죽음>_미셀 투르니에
나-미셀 투르니에는 철학자가 되려고 했다. 철학교수 시험에서 낙방했고, 이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4년생. 1943년에 발표한 <방드르디, 세상의 끝>은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하고 사유를 담은 작품이다. 존재와 형이상학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장-철학적이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과는 좀 다르다. ‘소녀-죽음’을 연결시킨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녀는 대개 성장이나 미래에 대한 상징으로 쓰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니체 철학에서도 보면 ‘아이’를 귀하게 보지 않나)
멜라니의 행동이 재미있었다. 신 걸 좋아한다든지, 스테인드글라스로 비쳐든 빛 속에서 부유하는 거라든지, 애인을 만드는 과정이나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과정 등... 존재론적인 어떤 초월을 말하고 있나하는 생각도 했다.
이-동서양을 관통하는 사상이 소설에 녹아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자살에 실패하는 것과 운명론적인 요소가 표현된 것 같고.
김-모리스 블랑쇼의 <죽음의 선고>라는 책이 생각났다.(검색해보니 1948년작) 느낌이 비슷하다. 블랑쇼의 책에는 죽음을 유예시키는 여자가 나온다. 호텔이 배경이었던 것 같다. 자전적 소설로 알고 있고 사적인 이야기가 많다.
장-소녀의 나이에 맞게(성장함에 따라) 죽음의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작문 숙제로 할머니의 죽음을 쓴 것부터 햇빛-목공소-밧줄로 이어지는...
김-죽음의 이미지를 볼 때만이 해방감을 느끼는 캐릭터다. 소녀가 나 같았다. 나도 어릴 때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죽음을 삶의 대립 개념으로 상정해 놓으면 사는 게 별 것 아닌 듯 느껴진다. 죽음이 해방구 역할을 한달까. 얽매이지 않게 되고 고통 앞에서 깔깔 웃게 된다. 극단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어떤 면에서 해방감, 해소하는 기분이 든다. 억압이 지나간 후의 현실로 돌아와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죽음을 인지하고 있으면 현실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34쪽 내용, ‘버섯 권총 밧줄은 세 개의 열쇠였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장-예전에 본 영화가 생각난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소녀가 못해본 걸 하려고 마음먹고 특히 연애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결국 죽게 된다.
대개 사람들은 죽음을 먼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상황이 되면 달라지는 것 같다.
김-죽음을 코앞에 두면 삶이 시시해진다. 자질구레한 것에 신경쓰지 않게 된다. 현실이 답답할 때마다 죽음을 코앞에 갖다 두는 버릇이 있다.
나-저랑은 반대네요. 저는 니힐리스트가 돼버리는데. 성격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나도 김 샘과 비슷하다. 내려놓고 나니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퇴직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어느 날 내 책상 앞에 아래 직원이 섰는데 발발발 떨고 있는 게 보이더라. 호통 치는 상사였다. 평생 예쁜 짓을 안 하고 살았다. 근무하는 내내 그랬겠지만 모르고 지내다가 그날따라 긴장한 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더 나가면 조직에도 폐를 끼치고 나도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을 결심한 이유다.
왓슨과 크리커라고, DNA 발명한 사람인데 “DNA 발명 이후 인간은 신비함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했다. 발명한 게 100년도 채 안 된다. 내가 전남 나주군 나주읍 몇 번지에 태어나 어떤 혈액형을 가지고 이렇게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사람마다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찰스 다윈 시절에는 문장을 길게 썼고, 한 문장이 2-3쪽까지 길어지는 것도 있었다. 그게 그 시절 석학의 문장이었다. 프루스트 소설도 그렇지 않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그걸 무시하면 안 된다.
** (결말) 기요틴 이야기
장-멜라니가 단두대를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쉬로 아저씨는 멜라니가 죽음에 빠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녀는 클래식한 것을 좋아했다. 오래된 것을 다듬어서 멋지게 재탄생한 단두대를 보여주고 싶어서 가져왔을 것이다. 흉측한 것을 멋지게 표현한 점이 좋았다.
장-프랑스인들에게는 단두대가 특별한 의미인 것 같다. 혁명의 상징이랄까. 구글 검색을 해보니 크기, 디자인이 다양한 게 많고, 장신구처럼 갖고 다닐 수 있게 만든 것도 있더라.
이-단두대가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 건 확실하다. 루이 16세의 시대가 끝남과 ‘혁명’이 맞물린 것처럼 소녀를 다른 세계로 보냈다는 의미가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진짜로 실물 크기의 단두대는 아니었을 것 같다. 장식품처럼 깜찍한 어떤 것? 쉬로 아저씨는 장인이었으니까 실용품의 그것을 가져오진 않았을 것이다.
<왼손>_한강
2000년대 소설
김-뇌에 문제가 일어났다는 생각은 올리버 섹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생각나게 했다.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고 뇌병변이 일어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특이한 사례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구절이 생각났다. 관련은 없지만 그 문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장-그는 불쌍한 사람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표현도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사람 좋다’는 말을 들으면서 사는 사람인 것 같다. 언제나 손해를 보고...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 대개 가정에는 소홀하지 않나? 이 소설의 주인공도 그렇다.
주인공의 반항이 긍정적이었다. 건설적인 방향의 반항이라기보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보통 사람’처럼 사는 것에 대한 반항이랄까? 보통사람처럼 사는 게 행복하냐고 물으면 그 대답도 아닐 수 있지만 어쨌든 남자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엄청 찌질하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다가 어느 순간 “나네?” 하는 지점과 만났다. 감정이입이 됐다. 불쌍하게 느껴지고 의미부여를 하게 됐다. 굉장히 좋게 읽은 소설이다.
나-왼손의 의미층이 굉장히 넓은 것 같다. '왼손은 OO다'라고 꿰맞출 수 없는 어떤 것. 욕망이 될 수도, 무의식이 될 수도, 그저 오른손과 비슷한 왼손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 타자화 되기도 하고, 신의 위치에서 왼손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겹겹의 층, 의미의 확장을 시도한 점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선혜와의 만남은 좀 작위적이지 않나? 그 여자의 과거도 그렇고.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대화나 그날 밤의 동침도 그렇고.
이-나는 어색하지 않았다. 몰입하면서 읽다보니 중반 이후 남자의 외도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저항감이 없었다.
장-나는 선혜라는 여자를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버스로 퇴근하던 수많은 나날 중 어느 한번은 그 여자를 봤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거다. 작가가 그런 내용을 소설에 쓰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추측을 했다.
김-처음에는 왼손의 반란이 꿈인 줄 알았다.
이-나도 그랬다. 판타지를 그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얘기네...하고 푹 빠졌다.
왼손과 오른손, 손이 두 개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사고치는 놈도 있고 붙잡아주는 놈도 있고. 자아통합이 일어난 거다.
나-왼손도 나, 오른손도 나, 결국은 나로 귀결되는 소설이네요.
<투레질>_이만교
투레질한다는 말을 전라도에서는 틀분다라고 했다. 처음엔 투레질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도시화와 요즘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예능 프로의 인기에 대한 이야기...
나-패턴을 각각의 사례로 표현하지 않고 하나의 패턴으로 양식화 한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패턴으로 뭉쳐진 덩어리 같은 소설이랄까.
장-산업자본주의의 패턴, 자기계발서 열풍이나 글쓰기 열풍 같은 게 생각났다.
김-나만의 독특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패턴이다. 나는 다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억압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는 세상이다.
이-새로운 패턴을 만드는 사람이 시대를 리드하는 거다.
장-무슨 무슨 주의 같은 미술사의 화풍도 그렇고 패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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