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길어서 월부터 목요일까지 필사를 쉬어야 할 판.
원래 '빨간 날'은 안 올리는데 월요일이 임시공휴일이 되고 보니 '너무 쉬는 거 아냐' 하는 걱정이 되었다.
그 마음을 단톡방에 썼더니 연휴에 올려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급하게 번외편을 준비했다.
설 연휴 번외편으로 2025년 신춘문예 당선작을 소개합니다.
월요일과 수요일은 단편소설의 일부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시 한 편을 올릴게요.
번외편이므로 이름 인증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 짧은 소감을 남겨주시면 따분한 연휴에도 문학으로 생각을 나누고 소통한다는 기쁨에 흐뭇할 것 같습니다.^^
(번외편1) 2025.1.27.월요일
홍성구, 「폴리 사운드」
사운드 디자이너라고 하면 고민 없이 부풀어 오른 질문들이 날아든다. 음악하세요, 아니 디자이너니까 미술 쪽인가. 사운드를 디자인화하나요, 디자인을 사운드화하나요. 청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공감각의 예술인가.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고요한 공중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잠자리를 몰래 잡아채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포획의 목적은 잠자리가 아니다. 잠자리의 소리다. 그물망에 든 잠자리를 조심히 빼서 사각의 채집통에 넣어 두고 귀를 연다. 잠자리의 날개끼리 충돌해서 나는 타닥타닥 소리. 그 소리는 점점 허물을 벗어 잠자리에서 탈피한다. 사운드 디자이너는 잠자리의 소리를 다른 무언가의 소리와 연결하는 사람이다. 대개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사실 뭘 어떻게 인위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사물에 있는 것을 튀어나오도록 하면 된다. 숨어 있는 물성이 드러나도록 상황을 마련하는 게 나의 일이다. 적막한 설산을 걸을 때는 굵은 소금이 뿌려진 바닥을 밟으며 밀가루 포대를 손으로 주무른다. 수풀이 바람에 휘날릴 때는 릴테이프 더미를 양손 사이에 놓고 비빈다. 중세 시대의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릴 때는 콘크리트 벽돌들을 포개어 놓고 두 벽돌을 맷돌 돌리듯이 간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있는 것을 끄집어내면 된다. 채집하고 발견하는 셈이다. 순서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채집하려면 발견이 우선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채집이 먼저이다. 채집한 후에야 발견할 수 있다.
#2025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문장에 대한 짧은 생각
지난주에 올해 신춘문예 당선 소설 일곱 편을 후루룩 읽었는데요, 첫인상은 ‘예전보다 별론데?’였어요. 마음에 확 들어오는 소설은 없고, 이게 뭐야? 하는 소설은 있어서.^^;;;; 2월 개강, 마음만만연구소에 진행하는 소설창작워크숍에서 이야기 나눌 예정이라 그 전에 꼼꼼히 볼 건데 그러면 또 느낌이 다르겠지요.
‘번외편’만의 공통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페르난도 페수아의 『불안의 서』를 뒤적이다가 괜찮은 구절을 찾았는데(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필사하고 싶은 멋진 글이 가득!) 예술과 글쓰기에 관한 거라서, 그럼 시는 또 뭐로 하나, 책장을 보고 또 보고. 그동안 문학 필사를 진행해오면서 꽤 많은 책을 어루만졌던 터라 얼핏 새로운 게 없어 보여서 익숙한 듯 쥐었던 책을 놔주고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신춘 당선작 중에서 골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번외편이니까!
아무튼 위의 글은 소설 전반에 대한 느낌은 그저 그런데 ‘사운드 디자이너’를 설명한 저 문단만은 좋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종종 소설을 ‘줄거리’로 읽는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줄거리를 뒷받침해주는 느낌’으로 읽는데. 흥미로운 플롯을 따라가지만 ‘사건 소개’만으로는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이, 그 사건을 움직이는 인물의 행동 묘사와 인물이 바라보는 시선의 장소 묘사, 인물의 짐작, 기대, 실망 등을 담은 서술이 당연히 영향을 미치잖아요. 정신없이 이야기를 좇아가다가도 (영상에서 클로즈업하는 것처럼, 슬로모션으로 찍는 것처럼) 돌연 속도가 느려지는 순간이 오고, 그 순간 달라진 풍경, 달라진 냄새, 달라진 소리에 감동하고 충격받기도 하는 게 소설 읽기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특정 직업을 설명한다면 위의 글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단순히 어떤 일을 한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고요한 공중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잠자리를 몰래 잡아채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라는 비유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잠자리를 가져와 잠자리 관련 용어(?)로 문장을 이어가는 솜씨도 좋다고 느꼈고요.(그물망, 채집통, 날개, 타닥타닥, 허물, 탈피……) “사운드 디자이너는 잠자리의 소리를 다른 무언가의 소리와 연결하는 사람”이네요.
그다음 문단은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인데 이런 전문성에 관해서는 일본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에서 너무나 인상적으로 봤기 때문에 비슷한 에피소드를 문장으로 읽은 것 같다는 정도? 그런 의미에서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 강추합니다!(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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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2) 2025.1.28.화요일
최경민, 「예의」
옆자리가 그랬다
살아있으면 유기동물 구조협회구요
죽어있으면 청소업체예요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나가면
누울 자리를 뺏긴다는 걸
그래도 가야 한다
새벽에 하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고양이는
새벽에 일어난 우리들보다
조금 더 불쌍하다
그래도
다 보고 올까요
죽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관할구역 끝까지 갔다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게
기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2025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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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3) 2025.1.29.수요일
이수정, 「숨이 차오를 때」
이전과 다른 느낌이 있었다. 바닥을 움켜쥘 기세로 온 발가락에 힘을 주고 섰는데도 발아래가 막막한 느낌이 아까처럼 무섭지만은 않았다. 수면 가까이 어깨 쪽 맨살에 미약하지만 뭔가 닿는 느낌도 새로웠다. 숨결처럼 얇은 막이 수면을 덮고 있다가 내 머리가 들어가는 순간, 딱 그만큼만 벌어졌다 도로 닫히는 느낌…. 소리의 느낌도 달랐다. 물 밖에서 웅얼대는 소리가 덩어리로 뭉쳐 비닐 공처럼 수면을 부유할 뿐 물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물속이 아니라 방음 잘된 밀실에 몸의 일부를 디밀고 있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묘하게 아늑해 천천히 수를 세는 동안 나는 눈도 뜰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사람들의 다리였다. 사타구니까지 드러난 맨다리들이 수몰된 문명의 아이오닉 기둥처럼 적막하게 늘어서 있었다. 얼핏, 숨이 가빠졌다. 아직 숨찰 무렵은 아니었다. 어떤 기시감 때문이었다. 그럴 리 없는데, 물속이 낯익었다. 물속이 낯익은 건지 얼굴이 낯익은 건지…. 거기, 얼굴이 있었다. 맨다리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은 물결 따라 일렁이면서 표정이 바뀌었다.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물 밖에서 물속의 나를 보고 있었다. 수영장 천장의 그림 속 여신 얼굴이 비친 걸까. 더는 숨을 참기 힘들어 물 밖으로 고개를 들려는데 물결이 잦아들며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안도감이랄까, 두려움이랄까….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표정을 한꺼번에 지닌 여자의 얼굴은 기괴했다. 여자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듯 여자의 얼굴이 내 얼굴 위로 덮쳐왔다. 나는 비명처럼 숨을 터뜨리며 허리를 세웠다.
#2025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문장에 대한 짧은 생각
학생들과 함께 하는 소설 클래스에서, 어느 해엔 아이들이 수영 이야기를 너무 많이 써오는 거예요. 그 학기, 그다음 학기에 “방학 때 뭐 했니?”라고 물어보면 “운동했어요.”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운동’ 중에 ‘수영’을 선택하는 친구들이 꽤 됐는지 소설에 수영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했더랬어요. 그때의 ‘수영’은 수영한다, 수영장에 간다, 물속에서 몸을 움직인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위의 글 속 화자도 ‘수영을 배웁니다’. ‘수영장 선배’들은 여자에게 고양이 세수만 하지 말고 머리를 담그라고 재촉합니다. 몇 번의 시도. 굴욕. 물 먹기. 그러곤 머리를 넣는 데 성공합니다. 그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만난 작은 세계를 묘사한 문장들이 좋았어요. “숨결처럼 얇은 막이 수면을 덮고 있다가 내 머리가 들어가는 순간, 딱 그만큼만 벌어졌다 도로 닫히는 느낌”과 “물 밖에서 웅얼대는 소리가 덩어리로 뭉쳐 비닐 공처럼 수면을 부유할 뿐 물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고 “물속이 아니라 방음 잘된 밀실에 몸의 일부를 디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묘하게 아늑했던 경험.
“수몰된 문명의 아이오닉 기둥”이라는 연상이 흥미로워서 ‘아이오닉’을 찾아보니 현대차 아이오닉만 나오고. ㅋㅋ 바로 챗GPT에게 물었더니. 아이오닉 기둥(Ionic column)은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 중 하나래요. 우아하고 균형 잡힌 비례를 가지며, 장식적이고 정교한 스타일로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사진은 구글에서 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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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4) 2025.1.30.목요일
백아온, 「디스토피아」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의해 회복되는 우울한 로맨스 영화처럼.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요, 내가 엄마를 찾아볼게요.
어느 날은 그늘에 있기엔 너무 추웠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찼다. 당신도 춥지 않아요? 물어보려던 것을 꾹 삼키고 말았다. 나는 그 공원에서 덜덜 떨며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오랜만에 행운목에 물을 주고 왔어요. 행운목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살지요. 나는 가만 듣다가
당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라고 아무런 사연도 없는 줄 알아요?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사연이 알고 싶었고, 그 역시 나의 사연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늘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그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텅 빈 손을 흔들었다.
그를 정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플라스틱 피부에 덧칠된 이목구비와 단 하나의 표정을 보았다.
가까운 미래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지금껏 그와 나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 안기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제조 일자가 쓰인 전구처럼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바랐다.
저수지에 가서 호리병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깨뜨려보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어디선가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호리병을 그대로 버려둔 채 바깥으로 달려갔다.
도망친 곳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가 폐기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었다. 내가 가짜였더라도 당신은 적당히 건강하게 지내요. 이따금 사람들과 핑퐁을 치기도 하고. 오래된 불안과 결핍은 나를 더 아쉽게 할 테니까요. 당신의 이마는 부드러웠어요.
나는 그가 닫아준 몇 줄의 감상과 조용한 꿈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2025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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