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일상/여행과생활

선정에 반하다-아주 긴 일기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운전 중에 문자를 받았다. 예술로(路) 협업사업 참여예술인 2차 심의 결과를 메일로 통보했다는 내용이었다. 신호 대기 상태에서 메일함을 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조금 두려웠다. ‘신정되셨습니다’라는 글을 읽는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작은 슬픔이 밀려들었다. 지난 인터뷰 심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선정’이라는 단어에는 핑크빛이 칠해져있었다. 그냥 굵은 서체거나 파란색이어도 좋았을 텐데 진분홍에 볼드라니.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에 따라 면접심의는 온라인이 아닌 대면인터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78명의 지원자 중 1차 합격자 300여명이 그 대상이었다. 그룹 당 4명씩, 팀은 40분 간격으로 촘촘히 나눠져 있었다. 심의는 3일간 계속됐다. 장소는 토즈 종로점. 벽을 등에 지고 면접관 세 명이 앉아있었고 맞은편에 ‘우리’가 자리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이름표를 가슴에 달았다. 문학-이재은.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한두 번의 참여예술인 경험이 있습니다. 이전의 활동에서 어려웠던 점이나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말씀해주세요.”

안 좋은 말부터 듣겠다니... 불편했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지지난해 지원사업에 합격한 후 나는 한국산업단지공단 인천지부에 자동 파견되었다. 몇 천 개의 기업체가 모여 있는 남동공단에서 협업활동을 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나를 포함한 연극, 만화, 미술 분야 작가들은 선택의 기회 없이 산업단지공단에 발령 난 데에 불만이 많았다. 우리는 포기할 수 없었고, 미아처럼 공단을 떠돌다가 양말인형을 만들어 홍보영상을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기업/기관과의 일대일 매칭이 아니었던 탓에 공장으로 가득한 구역에서 살길을 찾는 게 피곤했다고 말했다.

제출서류를 바탕으로 한 개인질문이 이어졌고, 내 옆사람과 옆옆사람이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명은 연극단체에 소속돼 있었고, 한 명은 대학 시간강사라고 했다. 고용보험 가입자는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아니었다. 그들이 있어 보이기도, 내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 사업에 신청하신 이유를 돈이나 협업의 장점은 제외하고(그건 너무 당연하니까요) 말씀해보세요.”
“각기 다른 영역의 예술인, 성격과 성별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합니다. 불화가 생겼을 경우 이를 해결하는 자기만의 노하우를 2가지씩 말씀해주세요.”

나는 노하우를 말하지 못했다. 글쎄,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중얼거렸고(잘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질문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요구했다.

“지금 하신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세요.”

오가는 말은 딱딱하지 않았지만 공간, 자리, 관계는 ‘전형적’이었다. 누군가는 평가하고, 누군가는 평가 받고. 그들은 못다 한 말이 있거나 자신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눈만 끔뻑거렸다. 구걸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지원서류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고, 그건 진심이었지만 쓸모를 증명하는 문제만 놓고 보면 꼭 파견사업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돈 때문에 지원했음을 속일 수 없었던 나는 그걸 감출 자신이 없어서 가만있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한 사람은 “오늘따라 심사가 재미있다”고 유쾌하게 말했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웃어주었다. 나는 나가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카디건을 손에 쥐고 엉덩이를 들썩거렸고, 문앞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가장 먼저 방에서 나왔다. 모월 모일 11시 10분에 2번 방에서 면접을 본 예술인 네 명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고, 덜컹임 속에서 누군가 “모두 합격하셨으면 좋겠네요”라고 덕담했고, 문이 열리자 허리까지 고개를 숙이고 헤어졌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므로 다시 만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면접심의 대상자는 302명. 그 중 242명을 선정했다고 그저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공지했다. 면접심의 총평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2차 인터뷰 심의에서도 거의 천편일률적인 답변이 나오는 것에서 예술가의 “재해석”이 없는 “준비된 정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정답(?)의 틀을 깨고 예술가들의 자아를 직접 만나고 싶었고, 갈등과 문제 해결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전체적인 경쟁률이 높고 코로나19라는 환경적인 조건 탓에 긴장하고 심기일전하여 면접에 성실히 임하고 본 사업의 참여에 열정을 보여준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예술인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합격했음에도 심사평을 읽는 내내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고, 초라했고, 억울한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안쓰러웠다.


인천문화재단 예술인긴급지원사업에는 떨어졌다. 영종도에 사는 소설가 두 명과 ‘문학에서 찾은 질병의 풍경’이라는 제목의 낭독회를 기획안으로 냈는데 별로 매력이 없었던 것 같다. 지난달에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온라인으로 활용 가능한 창의적인 문화예술교육 내용 및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집한다기에 머리를 쥐어짜서 참여했는데 선정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문학과 온라인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반드시 연결해야 할지/그런 세상이 온 것인지) 고민과 걱정이 많다.

문학과 글쓰기를 전면에 내세운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일상의 작가>도 올해가 끝이라고 한다. 첫 해 16개 공간에서 진행했는데 다음 해엔 13곳, 올해 8곳밖에 뽑지 않길래 뭐지? 떨어질까 두려워하며 서류 내고 온라인면접을 봤는데 운 좋게 붙었다. 다른 꿈다락과 달리 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 난제로 작용했을까? 문학이라는 장르가 인기가 없는 걸까? 지난 두 해의 경험에서 참여자들이 대화에 목말라있다는 걸 알았고, 올해는 ‘인터뷰/글쓰기’를 테마로 할 예정이다. 대화 관련 책을 많이 찾아보고 있고, 쉽고 유익한 소통 방법도 연구 중이다. 총 3기수인데 성인만 참여하는 기수도 있다. 토요일에 하는 거라 모집이 어떨지 모르겠다. 노는 거 반, 배우는 거 반이라고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면 진짜 즐거울 텐데...


그럴수록 요일가게에서 하는 소설읽기+글쓰기 강좌가 더욱 소중하다는 걸 알겠다. 봄 강좌가 끝나면 바로 여름 강좌를 이어갈 텐데 퇴근 후 여기까지, 서울에서 여기까지, 편안한 집에서 여기까지 오시는 분들이 진짜 귀하다. 참여비 입금 후 “내 삶에 기쁨이 되어버린 강좌”라고 메일 보내신 분은 두고두고 사랑스럽다. 스승의 날에는 팡파르 이모티콘과 함께 두 분에게 감사인사를 받았는데 ‘그런 거 안 보낼 것 같은 분’에게 왔기에 답장에 ㅋ를 다섯 개나 나열하고 말았다. 진짜 꽃이 아니어도 괜찮아. 고맙습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를 매우 흥미롭게 읽고 있다. 곳곳에 밑줄을 긋고 멈춰 생각하느라 더디게 읽힌다. 김성우 씨가 <어머니와 나>라는 책을 썼다는 걸 알고 바로 주문했다. 239쪽에 적힌, 마치 내 이야기 같은 고백. “탁월함에 대한 조바심을 떨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들보다 잘하자는 생각으로 일하고 공부했을 때 돌아오는 건 자괴감밖에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 그럼에도 여전히 키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힘이다. 높고 빛나고 당당해서 화려한 것들 말고, 낮고 떨리고 스러져 가기에 아름다운 것들에 말이다. - 잘하고 싶다기보다는 잘 이끌리고 싶다.” 아름다운 소설이 있어서 가난한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


정부에서 주는 재난지원금은 신청 다음 날 입금 확인했고, 그날 오후 동네 속옷가게에서 새옷을 샀다. 다양한 색깔로 여러 개 마구 구매하려고 했는데 쫄보라 세트 하나, 단품 하나 결제했다(세일할 때 다시 가기로). 슈퍼에서 조카들 과자 사주고, 나비날다 책방에서 책도 사고.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해있는데 지지난주에 모기, 바퀴벌레, 검은등벌레, 지네 등을 바닥과 천장, 침대에서 우르르 목격하곤 열흘 간 방을 비웠다. 세스코를 불러 꼼꼼히 방역 및 소독했다고 연락왔기에 어젯밤에 재입실. 벌레는 안 보이고 책상과 책장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띈다. 여기저기 닦느라 물티슈를 대여섯 장 뽑아 쓰고, 창문 앞에서 맥주를 마셨다. 자주 마시는 술이지만 오늘은 남다른 날이라고 우기면서 홀짝였다. 남들 너무 부러워하지 말자고.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자고. 모두 늙고 죽는다고... 많이 읽고 많이 쓰면서 살자고... 그런 다짐을 ‘처음처럼’ 다시 하곤 그러니 오늘은 마셔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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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2호선 만수역 도보 3분/운영자 이재은/글쓰기 및 소설 강좌 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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