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싫다는 새파란 거짓말-9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 비행기에서

변화는 버리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



*** 숙소에서

타인과 비슷하게 행동하면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다른 걸 하면 내가 이걸 해도 되나? 괜찮나? 신경이 쓰인다.

“나 소주 마실 거야.”

숙소에 들어온 나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말한다. 듣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혼술은 오로지 내 몫인데도 굳이 룸메에게 고하는 이유는 뭘까. 왜 알리는 걸까.

그에게 술을 달라는 것도, 안주를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술 마시면서 음악을 틀거나 혼잣말을 할 것도 아닌데. ‘내’ 가방에서 술을 꺼내 조용히 마시고 잘 치우고 가만 잠이 들 텐데.

상대에 대한 배려인가? 냄새가 날까 봐? 내 행동이 추할까 봐? 취함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고, 음주 행위는 독서나 음악감상, 일기쓰기와는 다르게 부정적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술에 의지하는 것이 쉬운 선택임을 알고 스스로 회피하는 것인가?

‘나는 다르다’고 인정하면 될 텐데 상대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눈치를 본다. 의자를 뺏는 것도 아니고, 옆에 있어 달라 조르면서 시간을 뺏는 것도 아닌데도.

상대가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언니 조금 심각한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오늘 술을 마셔도 될까? 마실까 말까? 여행 와서 이런 고민을 하다니. 그래놓고 산토리니에서 (나눠 마실 사람도 없는데) 1.5리터 와인을 샀고, 마당 겸 테라스에서 1리터를 마셨다......

*(하지만 룸메가 술을 전혀 안 마시는 건 아니어서 내가 소주나 와인을 마실 때 이따금 맥주를 사서 그 자리에 함께 했었다)


*** 산토리니 선셋포인트에서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생각했다.

완벽이란 뭘까.

붉고 동그란 걸 보지 못하면 우리는 금세 실망한다.
가늘고 길게 퍼지거나 구름 뒤에 숨거나 찌그러진 항아리처럼 보이면 그날의 기다림은 실패했다고 여긴다.

동그라미는 완벽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하지만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 기다림은 그게 아니었다.
고리에 걸린, 불완전한 해가 사랑스러웠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아니라 구름 자욱한 곳에 핏빛이 스며들었던 그때.
누군가는 실패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그 순간이 전부 내 것 같았다.



*** 산토리니에서

밤바다를 보면서 생각했다.

야경이란 뭘까.

때때로 도시의 조명을 보며 탄성을 내지른다. 빌딩 창문, 도로의 가로등, 상점의 네온사인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밝으면 밝을수록, 반짝거림이 많을수록 화려함에 만족한다. 평균보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봤다면 기쁨은 배가 되고.

시커먼 바다에 시선을 두고 와인을 마시면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뭐지? 막막한 까망을 넋 놓고 지켜보는 것, 얼마 안 되는 별빛을 찾는 것은 ‘야경 감상’에 해당되지 않는 걸까.

우린 뭘 찾는 걸까.



*** 거리에서

“길잡이로 일하는 동료 중에는 인도 마니아들이 많아요. 저는 패키지로 한번 갔었는데 너무 힘들고 싫더라고요. 길잡이 대부분이 인도부터 일을 시작하고 그 나라에 애정이 많은데 그 생각이 다르니까 대화에 낄 수가 없어요.
가난한 나라(?) 중에는 발칸반도를 좋아합니다. 마음에 들어요. 보스니아(헤르초크비나), 불가리아, 알바니아 이런 나라들이요. 여행하기에 쾌적하고 물가도 별로 안 비싸거든요. 저는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에요. 그런데 그쪽은 여행자의 수요가 많지 않아요.”

싸고 깨끗하고 편한 곳. 뭔가 알 것 같았다. 내게는 이번 터키 여행이 그랬다.

그렇지만 인도... 내게 인도는 버릴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안부를 묻지 않아도 잘 지내겠지 싶은 오랜 친구 같은 이름이다. 가난했던 시절(몸도 마음도) 나를 환대했던 나라. 호기심 가득한 큰 눈망울의 나라.

언젠가 인도를 또 찾게 된다면 그땐 마지막으로(!) 남인도&스리랑카에 가야지.


*** 산토리니에서

“우리 사회는 둥글둥글한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전 안 그렇거든요. 살면서 정말 손해를 많이 봤어요.”

어울려 사는 것도 좋고 눈치 보고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마음에는 뭐가 남을까?

“전 선생님들이 싫어하는 스타일이에요.”

“나는 선생님이 싫어요.”
무력감 속에서 툭 튀어나온 나의 대답.


*** 산토리니에서

1.5리터짜리 페트병에 든 Santo 레드와인을 샀다. 블로그에서 먼저 보지 않았더라면 와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알면 보인다고, 맨바닥에 위엄 없이 서 있는데도 눈에 확 띄더라.

지중해가 보이는 동굴 숙소 테라스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데... 야니에 이어 또 9와 숫자들을 듣는데...

슬프고 너무 좋았다.
눈물이 터졌다.

선셋을 볼 때마다 인도의 디우를 생각했었다.
그 시절의 디우에서 나는 ‘사람’을 그리워했다. 내 옆에 따듯한 사람이 있나 없나.
언제부터 사람을 잊었을까. 언제부터 타인을 잊었을까.

이제는 나만 생각한다. 혼자에 익숙해졌다.


*듣다가 운 노래:9와 숫자들-보물섬



*** 테라스에서

여행지에서는 ‘일상’에서보다 시간이 남아 돈다. 마음에 조급함이 없기 때문에.

소비하는 여행자와 소유하는 여행자.

나를 팔거나
나를 갖거나.

나는 후자다. 사람들과 ‘유하게’ 지내려는 생각, 잘 보이려는 욕심, 예쁨 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자극 없는, 평범한 언어를 듣는 일이 지루해서 일부러 나를 소외시킨다. 온통 여행 얘기. 어디에 가봤고 거긴 어땠고 그곳에 가고 싶고. 에피소드도 하루이틀이지.

순간순간 즐겁지만 여전히 웃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주던 길잡이의 “화나신 것 같아요.”, 사진을 찍고난 룸메의 “맨날 그 포즈야.”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 박물관에서

유물이 뭐지? 과거의 흔적? 역사의 복원?
주운 ‘물건’의 완성.

없는 조각의 빈자리를 현대의 발굴가가 그림으로 채워놓은 걸 보면서 이야기꾼의 역할을 생각한다.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일지도 모르는 것을 만드는 게 나(우리)의 역할 아닌가.


*** 숙소에서

팀원들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구경한다.

‘다들 난리구만.’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각 잡고 찍은 여행사진은 툭-툭- 싱겁게 찍어댄 생활사진보다 왜 매력이 없을까.



*** 기차에서

그리스 하면 조르바지.

조르바? 노동하는 육체에 음악과 술, 철학이 묻어있는 이미지?

조르바가 살았던 크레타섬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동화마을처럼 꾸며진 산토리니와 책속에만 있을 것 같은 고대 도시 아테네만 구경했다.
산토리니는 “그리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스타일로 정직하고, 아테네는 낙서, 구걸하는 사람들, 쓰레기가 넘치는 혼돈의 도가니.

톨비 5유로를 더 받아야 한다며 공항에서 오는 내내 구시렁거렸던 운전기사, 숙소 근처에서 물감 테러를 했던 청년들, 기차역에서 일행의 가방 지퍼를 열었던 이민자, 무뚝뚝한 얼굴로 던지듯 잔돈을 돌려줬던 마켓 직원... 어디에도 조르바는 없었다. 건강하게 꿈틀거리고, 씩씩하게 숨 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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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인천2호선 만수역 도보 3분/운영자 이재은/글쓰기 및 소설 강좌 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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