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필사했다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이십 년 전쯤의 일이다.

 
정해진 시간에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강의 시간까지는 늘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남았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을 꺼내고, 책을 펼쳤다. 책상에 엎드려 잤다. 매번 그랬다. 책을 꺼내고, 펼치고, 자고, 일어나서 다시 책을 읽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 잘 쓰고 싶었다. 독서는 즐겁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괴로웠다.

 

쓰는 일이 막막할 때마다, 쓰지 않는 삶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작가의 문장을 살폈다. 정돈된 글을 왼손으로 펴누르고, 오른손으로 한 자 한 자 옮겨 적었다. 신경숙, 김승옥, 이승우가 있었다. 시집은 한 권을 통째로 적었다. 풋사과의 주름살(이정록)과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을.

 

뒤늦게 입학한 나이 든 문창과 학생. 필사를 가장 많이 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때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훨씬 더 전,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고, 사는 일에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하던 이십 대 초반. 이번에는 집 근처 도서관이었다. 수험서나 문제집을 푸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필로 책상을 콕콕 찍어가며 어떤 글을 복사했다. 지금도 연필을 자주 사용하지만 한때 연필 사기, 쓰기, 깎기, 몽당연필 모으기가 취미였다. 그날도 연필로 타다닥 타다닥 자음과 모음을 잇다가 어떤 여자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저기요, 글쓰는 소리 엄청 크게 들리거든요? 조용히 좀 해주실래요?” 책받침도 대지 않고 얇은 노트를 목재 위에 그대로 올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빠져있었던 걸까? 얼마나 집중했길래 타인에게 지적받을 정도로 소음을 내는데도 몰랐던 걸까?

 

그때의 노트를 아직도 갖고 있다. ‘내 손으로 쓴 글’을 보는 건 타이핑한 글을 보는 것과 다르고, 책으로 인쇄해 나온 글과도 당연히 달라서 생각날 때마다 읽어보면 좋다는데 그러진 못한다. 안 버리고 보관만 하고 있다. 저기 있는 것만 안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때의 시간만은 온전했던 것 같아서,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문장’에 힘입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쉽게 버릴 수 없다.

 

이후에도 종종 필사를 즐겼고, 더 자주는 종이가 아닌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지난겨울(코로나 유행 전) 터키 여행에 가져갔던 책(『용의자의 야간열차』, 다와다 요코)을 돌아와서 베껴 적었는데 그때도 노트북 앞이었다. 경장편이라 단편보다 길기도 했지만 이제는 ‘타인의 글’에 예전처럼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은 이기심도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소설의 구조를 좀 알지, 이제는 문장의 완성도를 파악할 수 있지, 나는 내 글을 쓸 거야. 일독(一讀)도 만족스러웠고, 필사하며 재독(再讀)한 느낌도 꽤 흡족했다. 어떤 쓰기는 명상 같다.

 

작품 전체가 아닌 ‘일부 필사’는 이번에 처음 해봤다. 1월에 숭례문학당 ‘분야별 필사 30일’을 신청했고, 한 달 기준 23개의 필사글을 접했다. 문학, 비평, 인문학, 칼럼 등을 다양하게 소개받을 수 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션 성공! 부분 필사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런 식으로 하면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배움을 얻었다. 이후 도서관에서 필사 관련 책을 여러 권 빌려 ‘필사법’에 대해 공부했다. 음, 나도 할 수 있겠는데?

 

<문장력 키우기-문학 필사 30일 1기>는 이런 과정에서 탄생했다.

 

명언 한 줄 옮겨 적는 걸, 띠지 문구 하나 마음에 품고 있는 걸 ‘필사(혹은 유사형태)’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작품 하나를 통째로 적어야 한다고(예전의 나처럼) 믿는 분도 있을 듯하다. 어떤 게 특히 좋을 수는 없지만 한 문장에 감동했다면, 한 권에 집중한 경험이 있다면 이번에는 다른 방식의 필사를 해보면 어떨까. 작가가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 이 문단에서는 어떤 흐름을 발견할 수 있는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 ‘연어’(문장)는 왜 그런 것인지 성실하고 정확하게 짚어주는 사람과 함께.

 

“손으로 쓰지 않고 타이핑 해도 되나요?” 누군가 질문했다. “안 하는 것보다 낫죠. 하지만......” 결과는 같다. 누가 내던져준 열 줄의 글이 하나 더 만들어진다는 것은. 하지만 과정은 다르다. 여기에는 속도와 욕망이 개입된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결과물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 타이핑은 빠르다. 서두르게 된다. 놓치는 건 없을까? 손은 느리다. 느림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상황을 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지켜보게 된다. 타이핑 필사는 키보드에 내맡기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자꾸 잊는다. 지금은 다 알 것 같아도 며칠 후에 보면, 나중에 보면 그때 이랬나? 이런 게 있었나? 놀라는 일이 잦다. 손 필사는 그 감각을 지지해준다. 필사를 신청했던 내 마음, 내 글씨체, 내가 썼던 펜, 내가 좋아했던 색깔을 떠올리게 해준다. 리을(ㄹ)을 한 획으로 썼는지 세 획으로 썼는지, 동그라미를 크게 그렸는지 작게 그렸는지. 그런 점에서 필사 후 꼭 메모를 남겨놓자. 이 글에서 느낀 점과 새롭게 깨달은 점 등등.

 

아침 습관을 권한다.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필사였으면 좋겠다. 열 줄에서 열다섯 줄 사이의 필사 문장을 손으로 베껴 쓰는 데는 10분에서 15분이 걸린다. 1분에 한 줄, 길어야 15분. 우리가 하루에 16시간을 깨어있다고 할 때 960분 중의 15분. 해볼 만하다. 해보면 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것을. 차츰 문장 보는 눈이 달라지고, 더불어 내 문장이 달라진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거라면, 이걸 하면 된다. 좋은 문장으로 의식을 깨우자. 내 언어로 세계를 만들어가자. 토요일 정오다. 봄비가 내린다. 2021.3.20. 11:59

 

 

*내 경험을 적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청유형으로 나아간 이 글의 맥락 무엇?^^;;; 아무튼, 필사! 문학작품 필사 30일로 문장력 키우고 글쓰기에 자신감 얻으시길 바랍니다:)

 

 

 

 

 

반응형

이미지 맵

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소설,글쓰기강의/문학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