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본 영화 11편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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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7~8월은 방학.
여름내 집에만 있었고, 무지 심심했다. 책도 많이 읽고 소설도 쓰고 필사 준비도 하고, 드라마도 많이 보고 술도 마시고. 한 게 많음에도 이따금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좀 갈까? 하는 생각을 매일 했으나 생각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책도 읽어야 하고 소설도 써야 하고 필사 준비도 해야 하는데 가긴 어딜 가? 불온한 게으름.
그러다 8월 중순이 되었고, 아, 이대로 방학을 끝내기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극장에서 영화나 보자! 그걸 여름휴가로 삼자! 그리하여 약 열흘 간 몰아본 영화 11편.

1. 오펜하이머 ★★★★
이 영화를 보고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투하에 동의했는가 아닌가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도 있던데(하긴 영화 소개에도 그런 뉘앙스로 적혀있긴 하더라) 나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가 매력적이었다. 자수성가했다는 스트로스의 질투랄까 자격지심이랄까, 알고 보면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그것 아닌가 하여.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오해해버린 인간의 자디 작은 마음.
또 하나는 오펜하이머의 부인이 그에 대해 보여준 믿음. 오펜하이머가 재판 비슷한 걸 받을 때 그를 배신한 동료들도 있었지만 부인은 끝까지 그에게 의지가 된다. 백 점짜리 남편이 아니었음에도. 부인이 남편을 지지했다는 것보다 남편이 “아내는 나를 믿어줄 거야”라고 확신하는 진심이 너무 부러웠다. 결국 이 영화는 ‘대단한 천재 물리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을 지탱하는, 혹은 파멸시키는 요망한 마음 이야기’가 아닌가.



2. 달짝지근해:7510 ★★★
유해진 나와서 별 세 개 준다.
이병헌 감독이 극본 썼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별로였음.



3. 애스터로이드 시티 ★★★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로 유명한 바로 그 감독.
파스텔 톤 배경 너무 예쁘고 한 컷 한 컷이 예술인 구도도 정말 아름답다. 소행성이 떨어진 마을 설정이라든지 갑작스러운 외계인의 등장도 귀여워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으나, 진행이 너무 정적이라 어휴, 속 터지는 느낌. 살짝 졸았다.



4. 바비 ★★★★
난 볼만 하던데? 이걸 왜 페미니즘과 연결 지어 해석하지? 어리둥절. 너무 과한 의미 부여는 독이다. 즐길 수 있는 영화던데. 쨍한 핑크의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를 오가는 이미지도 다분히 영화적이어서 좋았다. 바비랜드와 켄덤의 대립 구도도 풋, 웃으며 이해할 만했고. 모든 이야기는(소설 영화 드라마 웹툰 등등) 결국 장르적 특징을 잘 살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눈요기 실컷 해서 행복했다.



5. 살바도르 달리 ★★★★
다큐멘터리. 달리 박물관 가보고 싶다. 바르셀로나 인근에 있다는데. 다시 스페인에 가게 된다면 지인과(이런 사람이 내게 생길까?) 자유여행으로 떠나 사그리다 파밀리아 한 번 더 보고, 구엘공원에 실컷 앉아 시간 보내고, 살바도르 달리 고향에도 가고, 거기서 물놀이도 하고, 박물관에도 가고 그랬으면 좋겠다.



6. 마에스트로 ★★★
잘 만든 음악 드라마. 갈등이 단순해서 어렵지 않고 결말도 훈훈. 지휘하는 부자 이야기인데 전반적인 정서가 ‘교향악’이라 품위 있게 느껴졌다. 밀라노 갔을 때 ‘라 스칼라’ 앞에서 사진도 찍었는데(가이드가 유명하다길래 그런 줄만 알았지) 영화에서 보니 새삼 오! 나 저기 가봤어!! 극장 내부도 나오는데 실제 그곳에서 찍은 거겠지? 실제 극장이 좁은 2차선 도로 옆에 있어서 그다지 위엄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곳이었군.



7. 엘리멘탈 ★★★★★
애니메이션이라 그런지(응?) 한 꼬집의 반감도 없이 별 다섯 개.
불의 마을 여자와 물의 마을 남자의 연애 코드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존재와 차이에 관해 언급하고, 종국에는 존중과 사랑, 이상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
불의 캐릭터와 물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원소(구름이나 흙 같은 것) 등을 표현하는 ‘경계 없음’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 선이 확실해야 좋은 그림, 예쁜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활활 타고, 줄줄 흐르고, 폭신폭신 떠다니는 육체들(?)을 구경하는 기쁨이 있었다. 어쩜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지!!!



8. 강변의 무코리타 ★★★
오랜만에 일본 드라마.
네 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제대로 돌봄 받지 못했던 주인공. 사기죄로 교도소에서 지내기도 했던 남자는 새로운 삶을 찾아 강변 마을에 오고, 얼마 후 아버지의 고독사 소식을 듣게 된다. “엄마는 쓰레기, 아빠는 고독사나 하는 개차반”이라며 그런 부모의 기질이 자신한테도 유전적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이웃들의 도움으로 자기애와 박애를 알게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는 법.
마지막에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 장례 치르는(치른다기보다 일몰 무렵 흙길을 걷는 것이지만) 장면과(그때의 하늘의 빛과 색) 그때 흐르는 노래 진짜 좋았다. 마지막 장면만 별점을 따로 줄 수 있다면 아낌없이 다섯 개!



9. 이름 없는 춤 ★★★★
일본의 댄서 다나카 민에 관한 다큐멘터리. 이누도 잇신이 만들었다.(메종 드 히미코, 구구는 고양이다 감독) 춤에 대한 민의 사유와 주장, 실천이 굉장히 매력적이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영화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보길 잘했다고 셀프 칭찬. “댄서와 관객, 그 사이에 춤이 있다”는 그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10.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
영화 보는 내내 돌덩이를 가슴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무거운 영화였다.
고문, 폭력 수위가 매우 높은데 그런 줄 알았다면 안 봤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보길 잘했다. 그렇게 찍어야만 했던 감독의 의도가 있었겠지.
때는 1930년대 스탈린 공포정치 시대. 군인으로 구성된 비밀경찰은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인이라는 이유로, 누구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자백을 받아낸다. 아무 짓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떤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잖아? 뭐 그딴 염려를 합리화하면서 탕 탕 탕!
불합리한 일들은 비밀경찰 내부까지 번져 볼코노고프 대위는 어느 날 추락해 숨통이 끊어진 동료를 목격하게 된다.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그는 그곳을 탈출한다. 그가 그곳에서 나온 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의 가족을 찾아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빌기 위함이었다. 볼코노고프는 상급자 무리에게 쫓기면서 희생자 가족을 찾아다니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그들은 대위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데...(이런 플롯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죽은 동료가 그의 앞에 나타나는 판타지적인 장면이며 곡기를 끊고 스스로 옥탑에 갇힌 할머니가 오른손으로 대위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용서하는 장면 등은 정말이지... 거기다 대위의 마지막까지. 휴.
굉장한 영화였다. 엔딩크레딧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곡은 또 왜 그렇게 절묘한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공포, 사랑, 두려움, 수치심, 부끄러움, 연민, 죄책감 등)의 A부터 Z까지를 본 느낌이랄까. 대위를 쫓는 폐병 걸린 소령을 ‘그렇게까지 살고 싶어 한 사람’으로 캐릭터화한 것도 신의 한 수. 정말이지 미친 영화, 그 자체였다.



11. 수라 ★★★★★
말이 필요 없이, 너무나 경이로웠던 다큐.
빨리 봤더라면 개강 전에 군산에 다녀왔을 텐데 8월 말에야 봐서 아쉽다. 봄에 군산 갔었고, 시내에만 머물다 왔는데 근처 어딘가에 넓은 갯벌이 있고, 장승이며 새들의 서식지가 있었구나. 단순히 ‘환경 보호’ 차원에서 만들어진 다큐가 아니었고, 사람의 역사며 새들의 삶도 성실하고 찬란하게 담겨 있어 보는 동안 놀라움에 전율이. 조만간 가야겠다. 수라 갯벌과 갯것들 만나러. 새소리 바람 소리 풀 소리 들으러. 그곳의 하늘을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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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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