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여성인권 활동가 이야기] ‘초록을 주세요’ 창작 후기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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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일면식이 없는 분이 내게 전화를 했다. 이러이러한 걸 기획했다고 하면서 자문회의 참석을 요청하셨다. 내가 ‘의견을 낼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기꺼이 수락했고, 그날 기획자 선생님에게 처음 인사했다. 참석자는 이랬다. 기획자 샘(알고 보니 민우회 대표도 하셨을 만큼 여성운동 최전선에 있던 분이었음), 활동가 샘, 인천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그리고 나.

회의에서 기획자 샘이 어떤 걸 하고 싶은지 자세히 들었고, 정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평에 여성운동 단체가 많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뒤 ‘문학적’으로 풀어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인터뷰를 한 뒤 그분을 잘 소개한다’가 아닌 ‘인터뷰를 한 뒤 그분을 소설적으로 잘 소개한다’에 꽂혔다. “진짜 소설처럼은 쓰지 못하겠지만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결과물이 나왔으면 해요.”

그 자리에 작가(나)가 있었으므로 내게도 한 꼭지 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고 잘 할 수 있을지 약간 겁은 났으나 ‘나름 흔쾌히’ 수락했다. 내 능력과 상관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부평에는 한부모여성인권운동, 장애여성인권운동, 이주여성인권운동, 여성노동운동 단체 등이 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되고 여러 분께 기획 취지를 말씀드리고 인터뷰를 부탁했으나 다섯 명 중 세 명이 거절. 딱 두 명, (사)한부모가족회 한가지 대표와 신나는여성주의도서관 랄라 관장이 수락했다. 그들의 이름은 치우와 부파.

나는 치우를 만났고(여성운동 현장에서는 ‘○○님’, ‘선배’, ‘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 직급, 연차가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게 서로를 별칭으로 부른단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썼다.

쉽지 않았다. ‘소설’이라지만 근본적으로 이 작업의 출발은 누군가의 인생을 사실적으로 담아내야 했으니까. 고민 끝에 치우 이야기는 고백체로 살리면서 알맹이로 남도록 하고 그걸 포장할 껍데기를 만들기로 했다. X의 세계는 그렇게 탄생했다.

‘초록을 주세요’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다음 봄에 X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X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컬러 카드가 있어야 했다.
하양, 검정, 빨강, 초록, 파랑. 다섯 색의 카드 중 어떤 것이 X의 세계에서 매력적인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떤 색이든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X에서 살 수 있었다.
하얀색 카드가 실내에서 일할 수 있는 인공지능 연구나 의료계를 의미한다든가 파란색 카드가 ‘하늘 아래’의 현장 노동, 이를테면 로프공과 각종 건설업 투입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람들이 추측한 정보에 불과했다.


이런 글이 한 페이지쯤 되고 나머지 9~10매는 인터뷰이(한부모가족회 한가지 대표)의 삶과 일에 관한 내용이다.
결과물을 보여줬더니(초고라고 하자) 기획자 샘이 크게 두 가지 피드백을 했다.
1. X의 세계가 흥미롭다. 좀 더 자세하게 써주면 좋겠다
2. 치우의 이야기는 시간대별로 다시 정리하자(그러니까 자서전처럼)

내 소설을 두고 친절한 조언을 받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 신선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부끄럽기도 했다.(그분이수필로 등단한 작가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수정 끝에 2차 초고를 인터뷰이에게 보냈다. 아무래도 ‘타인이 쓴 본인의 삶’을 읽는 게 어색했던지 피드백 겸 2차 인터뷰를 위한 통화의 첫 대사는 이거였다. “제가 말을 이렇게 ‘세게’ 했나요?”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글을 못 썼구나...-_-‘

소설 속 화자의 이름을 창작이 아닌 본인 이름으로 해달라고 했다.
딸 이야기는 다 지워달라고 해서 구체적인 부분을 함께 짚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고유명사가 틀렸다든가, 금액이 잘못됐다든가) 수정, 혹은 삭제했다.

그분이 물었다.
“그런데 앞부분 X의 세계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주변에 보여줬더니 그분들도 도통 이해가 안 된다고 하고.” 그때 난 또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글을 못 썼구나...’

그래도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기획자 샘은 그 부분이 너무 좋다고 하더라고요.”(끄응, 다른 사람 끌어오기)
“네, 저는 이런 쪽엔 문외한이라.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이대로 둬도 돼요.”

(소설 써도 된다며? 그래서 ‘소설적’으로 쓴 건데...)

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고, 신나는여성주의도서관 랄라 관장인 부파 이야기를 쓰신 분의 원고도 마무리됐다. 나랑은 결이 너무 달랐다. ‘소설적’이지만 소설보다 산문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거였나, 나도 이렇게 써야 했나... 호불호가 전혀 갈릴 일이 없고, 모든 정보가 자세하고 꼼꼼하게 담겨 있으며, 읽기 쉽게 소제목으로 정리된, 게다가 장면 장면 에피소드처럼 읽을 수 있는 장점까지... (와. 난 망했다) 이제 와 후회한들. 형식을 바꾸려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고 시간이…
에라 모르겠다.

디자인 초안이 나왔다.(내가 함) 두 개를 보여드리면서 속으로는 ‘1번이 낫지 않나...’, ‘둘 다 별로이려나...’, ‘선택한다면 1번이겠지’ 했는데 내가 너무 심플하다고 생각했던 2번으로 하자는 게 아닌가! (세상 일 모른다)

디자인도 확정됐겠다, 일사천리로 작업해(일 처리 빨리하는 스타일) 샘플 인쇄를 맡겼고, 그걸 들고 2차 자문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거기서 또 한 번 충격을 받게 된다.

여성가족재단 연구원 샘도 활동가 샘도 ‘X의 세계’가 생뚱맞다는 거다!
(젠장)

모르겠다, 모르겠어. 언젠 소설적으로 써도 된다더니 당신들이 요구하는 건 기사 형식의 평범한 글이잖아! 항의하고 싶었지만 속으로는 내가 글을 진짜 못 썼구나... 못 쓰는구나...엉엉.
그냥 지워버리자, 앞부분 죄다 날려버리고 ‘고백체의 삶’만 남기자, 그렇게 결심했다. 집에 와서 씻고 한숨 돌리는데 기획자 샘에게 전화가 왔다.

“고민해 봤는데 역시 전 X의 세계를 남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그 자리에 다른 걸 채워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셔도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는 정말 그 부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울컥함. 그리고 고마웠음)

“제가 ‘여는 말’에 선생님 글엔 픽션이 가미됐다는 걸 좀 더 친절하게 넣을게요.”

인터뷰와 글쓰기는 작가들이 맡았다. 인터뷰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풀어쓸 것인지 의논했다. 인터뷰이의 구술을 그대로 옮기되 글의 형식은 제한하지 않기로 했다. ‘재미있게’ 읽히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부모와 한부모 자녀들의 인권과 명예를 찾겠다는 치우(장희정)는 사단법인 한부모가족회 한가지의 대표이다. 치우는 이재은 작가가 인터뷰했다. 치우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글로 풀었지만, 도입부 X의 세계와 컬러 카드, K, 결미의 두 문장은 픽션이다.




예상보다 인쇄비도 비쌌고, 보통 일정 같았으면 벌써 도착해야 할 책이 오지 않아 전화했더니 ‘급속 주문’과 ‘장마’로 제작과 배송이 지연됐으니 급하면 ‘퀵 배송’으로 받으라고 하기에 추가로 이만오천 원을 더 쓰고...

그래도 잘 끝나서 다행이다.ㅎㅎ
사정상 출판기념 다과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진짜 소설’ 창작으로 요즘 머리 터질 지경)

좋은 기회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돼 영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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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_재은

1인문화예술공간(운영자 이재은) 글쓰기및소설강좌문의 dimfgog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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