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은의문화기행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1인문화예술공간(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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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아트인천 겨울호
[이재은의 문화기행소설④]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바라나시에서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루프탑. 푸른 물에 낚싯대를 내던지듯 꼬마 아이들이 하늘에 연줄을 띄운다. 눈동자가 닿는 곳마다 크고 작은 오색 사각형이 춤을 춘다. 기원전 육 세기에 탄생한 고도(古都). 미로처럼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며 복잡하게 얽혀있는 비좁은 골목에 아이들이 뛰어놀 공터는 없다. 레스토랑이 마련돼 있지 않은 옥상은 어디든 아이들 차지다. 삼삼오오 손에 실타래를 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호레요이-호레요이-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치고.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웃음소리.
힌두교 최대의 성지. 강가 화장터에서는 죽은 사람의 연기가 그지없이 피어오른다. 멀고도 가까운 데서 실어 온 주검이 차례차례 재가 되어 강에 뿌려진다. 수시로 물낯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명의 영혼들. 평온한 강물 위 가느다란 보트의 항해는 언제 보아도 신성하고 거룩하다. 뱃머리에 앉아 지는 해를 향해가는 이들의 마음. 가만하고 고요한 의식.



어느 겨울밤, 죽음과 장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클로즈업된 화장 인부의 검붉은 얼굴과 깊게 팬 주름 때문이었다고 말하면 너무 순진한 대답일까.
몇 주 뒤 나는 델리행 에어 인디아의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있었다. 좌측으로 창가와 중간 좌석이 비어 있고 내 자리는 통로 쪽이었다. 몸의 왼편이나 오른편에 사람이 없는 게 좋아서 늘 복도 라인을 선호했는데 예상과 달리 양쪽에 여유가 생기자 조금 허전하고 쓸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승객은 헬맷처럼 보이는 헤드폰을 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순간 탱크나 장갑차라도 본 듯 가슴이 답답해졌는데 ‘장비’를 착용한 모습이 다소간 병적으로 인식된 탓이었다. 비행기 탑승에 육체적 고통을 겪거나 정신적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있으니 추측건대 머리 위의 기구는 심신 안정을 위한 이완 물품이었으리라. 스크린에 최신영화를 재생한 사람, 기내 면세품 책자를 보는 사람, 개인 노트북을 펼치고 뭔가를 적는 사람, 뒤꿈치를 조이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사람, 들.
승무원이 건넨 웰컴 드링크를 마시고 잠시 눈을 붙였다 떠보니 누군가 타원형 창문에 바투 얼굴을 붙이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지? 의심하는 사이, 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상체의 방향을 바꿨다. 물기에 젖은 듯 촉촉하고 커다란 눈. 새로운 승객은 물방울무늬 블라우스에 감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여기 앉으면 안 되는 거 아니죠?
-물론 아닙니다.
-죄송해요. 앞쪽은 빈자리 없이 꽉 들어차서. 숨이 막혀서요.
눈짓으로 동의를 표한 나는 살짝 움찔했는데 부정어를 두 번 사용해 질문하는 여자의 말투가 J의 습관과 닮아서였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는 J가 ‘나쁜 결심’을 합리화할 때 종종 쓰는 표현이었다. 나는 자살을 ‘나쁘다’고 생각했고, 이따금 내 눈치를 살피며 J는 작지만 확실하게 중얼거렸다. 사는 게 죽을 만큼 괴롭다면 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그때마다 가슴이 시렸다.
J가 당장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들고 꽝꽝 언 시체로 나타나 내 발밑에서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얼얼해지는 발가락을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얼음처럼 단단하게 굳는 기분. 보이지 않는 절망과 무기력, 보잘것없는 통탄과 지치도록 싸워야 했던 시절.
-하나 드실래요?
여자가 초코칩이 박힌 쿠키를 내밀었다. 바삭바삭이 아닌 촉촉한 것.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뜻과는 달리 무심한 어감이었다.
-그런 걱정해 본 적 없으세요? 로또 당첨보다 확률이 낮은 비행기 추락 사고가 하필이면 내가 탄 그날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비행기가 불시에 곤두박질칠 확률은 0.000032퍼센트에 불과하다. 한 사람이 십만 번을 타면 그중 세 번꼴.
-해본 적 없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참혹할 것 같군요.
-난 여행이 싫어요.
여자가 한숨을 쉬더니 내용물을 비운 쿠키 봉지를 딱지 모양으로 접었다.
-누군가 자기소개를 할 때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 고백 속에 어디 어디를 다녔고 앞으로 기회가 되면 어디를 갈 거라고 우쭐대듯 이야기하는 걸 보면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것도 아닌데 여행이 마치 지식과 문화를 넓혀주고 찬란한 삶을 증명하는 별난 가치라도 되는 양, 여행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매력을 살려주는 것인 양 구는 게 끔찍해요.
나는 여행을 동경하지 않았고, 여행하지 않는 삶에 불만 또한 갖지 않았다. 스무 살을 맞아 가족과 함께 갔던 유럽 여행에서 나는 내내 찜찜하고 초조했는데, 안내자를 수동적으로 따라다니는 데서 오는 개운찮은 감정과 ‘오, 여기가 바로 거기!’ 하며 감탄을 쏟아야 하는 장소에서 침묵하는 자신에 대한 미덥지 못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여행 팀 인솔자로 돈을 벌죠!
여자가 이어 말했다.
-나에게 귀소 불안 증세가 있나 봐요. 출장 갔다가 돌아오면 한동안은 마치 처음 보는 세상을 맞닥뜨린 듯한 두려움을 겪어요. 가족과 친구가 나를 모른 척하고, 귀하게 키운 공기정화용 야자나무가 모두 죽어 있고, 입잣이 밉살스럽다며 지인들이 나를 외면하고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
-듣는 사람이 언짢아할 만한 말을 자주 하시나요?
-조언은 필요하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지적이나 충고로 여기지만요.
-잔소리꾼이라고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겠군요.
-맞아요.
여자가 팔을 들어 손뼉을 부딪쳤다. 경쾌한 동감의 표시였다.
-영어 방문 교사를 했어요. 코로나19가 터지고 수입이 완전히 끊기자 기분전환장애와 우울증이 악화했죠. 날이 밝아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회색이나 블랙이 내 마음의 기본값인 것처럼 종일 시커먼 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타인의 전화나 메시지에도 응하지 않고 때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고요. 선배 소개로 패키지 팀을 인솔하면서 안정을 찾았고, 염세와 허무주의에 사로잡혔던 정신도 차츰 고요해졌어요.
여자와의 조우는 우연한 것일까? 우리는 만나게 될 운명이었고, 바로 지금 기회가 온 게 아닐까? 여자에게 내 이름을 말하고 선물을 주고받듯 그녀의 이름을 갖고 싶었다.
-델리에는 어떤 일로?
여자가 물었다.
-내리자마자 국내선을 타고 바라나시로 갑니다. 거기서 한 달쯤 머물 예정이고요.
나는 J를 떠올렸다. J가 빈번히 짓던 표정과 한숨처럼 뱉던 날숨의 온도를. 그녀는 안개 속에 자신을 감추듯 서서히 내게서 멀어졌고 불현듯 이승을 하직했다.
-바라나시는 묘한 도시예요. 거기 있으면 떠나고 싶고, 떠나 있으면 그리워지는 야속한 곳이죠. 슬플 정도로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로 가득한.
-인도를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간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바라나시도 그렇다더군요. 젖어 들면 헤어나올 수 없다고.
-힌두교 최대 종교 성지 중 하나예요. 목숨을 잃은 뒤 그곳에서 태워지는 건 축복이죠. 내세를 약속받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한다고 믿으니까요. 신들도 바라나시에서 죽기를 갈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죽은 자뿐 아니라 산 자들에게도 인기가 있는데 강가에서 몸을 씻으면 죄가 사해진다고 믿어서 이른 아침 가트에는 벗은 사람들로 가득해요. 세수하고 입을 헹군 뒤 두 손에 물을 담아 마시기도 한다는데 저는 듣기만 했어요. 계단 아래 바글바글 모여 있는 인도인들을 자세히 관찰한 적은 없어서.
-화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럴 거예요.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진을 찍어대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유족이든 일꾼이든 다들 자기 사정에 몰두해 있어서 관광객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통제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지켜본 적이 있나요?
-처음에는요. 요즘은 화장터 근처에 잘 가지 않아요. 손님들에게도 너무 오래 머물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요. 구경거리가 아니잖아요. 일출이나 일몰 무렵의 보트 탑승과 저녁에 열리는 푸자 의식은 참여하는데 그게 여행객이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바라나시의 대표 문화예요. 혼자 오는 거랑 무리로 오는 건 다르니까 더욱 조심해야죠. 그룹 투어에서는 개별성을 긍정하고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아요. 저도 이젠 청크가 익숙해졌어요.
-청크요?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낱낱의 여행자가 아닌 팀으로 인지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냥 여행자가 아닌 작은따옴표가 붙은 ‘여행자’랄까. 좀 더 무게감이 있죠.
여자는 검지 두 개를 동시에 들어 마디 하나를 접었다 폈다.
-말하자면 완전히 이 직업에 적응해서 투정할 것도, 꼬투리 잡힐 것도 없어요.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선택한 일을 현명하게 책임지고 계시는 거네요.
-저 자신의 현명함이 아닌 이 일의 특징 때문인지도 몰라요.
나는 다정한 청자의 자세를 유지하며 여자가 계속 말하길 기다렸다.
-일정 기간, 그러니까 길어야 보름 정도를 함께 있다가 손님들과 작별하는 게 마음에 들어요.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할 때마다 얼마나 후련한지 몰라요. 내 안에서 뭔가 놓아버리는 거예요. 죽이는 것과 비슷할지도요. 이를테면 애정이나 연민 같은? 동일 인물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적으니까 ‘여행자’를 “안녕”하고 통쾌하게 떼어놓을 수 있죠.
-시절 인연 같은 거군요.
-그럴 거예요. 저는 시절이 아닌 찰나로 마인드 컨트롤을 해요. 75분의 1초.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갈 거야. 그럼 괜찮아질 거야. 여행이 끝날 거고, 너는 혼자가 될 거야.
-혼자가 된다는 것이……
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함께 고민에 빠진 것 같던 여자가 불쑥 팔을 뻗었다. 이번엔 레몬 사탕이었다. 여자를 따라 껍질을 벗겨 노란색 알맹이를 입에 넣었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혀로 사탕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입에 있는 그것은 활동 없이 조용히 녹고 있었다.
-인생이죠. 외로운 것도 인생이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을 뿐이죠.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자기기만이나 과장 없이 타인과 마음을 나눈 게 얼마 만인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J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었다. 반갑게 발걸음을 붙여오는 J를 피해 넌지시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내가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사랑했던 J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자 한때 나의 인생이었다.
잿빛 공기가 흐르는 기내에서 나는, 그제야 겨우 체념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고 썼던 어느 작가의 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요한 건 흐름. 효용 없는 시간은 없고, 산 사람의 시간은 여지없이 흐른다는 것.
착륙 예정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타원형 창문이 열리고 기내에 오렌지색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바로 하고, 덮고 있던 담요를 개고,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신는 등 승객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곧 도착하나 봐요.
돌아보니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모난 딱지와 사탕 봉지 하나.



이름 모를 건물의 옥상에서 꼬마 아이들이 하늘에 연줄을 띄운다. 꼬리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색색의 가오리연. 실타래를 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호레요이-호레요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 아이들. 경계하는 기색 없이 이방인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 J가 십여 년간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본 적 없지만 그들도 틀림없이…….
강물 위에 디아를 띄운다. 초와 꽃이 담긴 수십 개의 은박 접시가 흐르는 별 같다. 획을 그으며 우주에서 떨어진 별똥별 같다.
어둠 속에서 행복하길. 부디 어둠에 있는 게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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